남편은 연애하던 시절부터 사는 게 너무 빠듯하고 치열해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부모의 빚으로 허덕이며 20대를 보냈기에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 우리는 함께 일생을 가꿔나가기로 했다. 아이 없이, 둘이서. 남편과 나는 그렇게 9년 차 비출산 부부로 살고 있다.
비출산을 결심하고 나니 출산율 관련 기사나 통계가 나오면 그냥 넘기지 않고 클릭하게 된다. 지난 1월 3일에는 행정안전부가 2020년 출생자 수는 역대 27만 5815명으로 전년대비 10.7% 줄었다고 발표했다. 점점 우리 부부와 비슷한 사람들이 늘고 있구나 싶다. 통계를 보면 비출산이 늘고 있다는데, 내 주변에는 소위 ‘딩크족’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참견은 종류별로 다 들어본 것 같다.
출산과 관련된 참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먼저 ‘원초적 본능형’. 이들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파한다. 동시에 내가 그 본능(?)을 어떻게 억제하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어쩌나. 종족 보존의 본능이란 게 아무리 찾아봐도 내 안에는 없는데...
다음으로는 ‘행복 전도사형’. 이들은 아이가 주는 행복을 느껴봐야 한다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가르친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배우자와 긴 상의 끝에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했고,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 행복은 ‘찐행복’이 아니다. 이들은 가짜 행복을 누리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지...
‘호기심 천국형’도 꽤 많다. 이들에게는 비출산이 연구 대상이다. 끝도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왜 애를 안 낳아? 남편은 동의했어? 피임은 어떻게 해? 애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 나중에 후회할 걸? 어째 끝으로 갈수록 악담에 가깝지만 실제로 겪은 질문들이다. 솔직히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남편은 우리 관계의 당사자이니 당연히 비출산에 동의했으며, 애 없이도 보고 듣고 할 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고, 우리의 피임 방법은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 그러나 9년 동안 습득한 평정심을 발휘해 그저 “저희는 앞으로도 계획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화제를 넘긴다. 내 에너지는 소중하니까.
그렇다. 사람들의 가지각색 참견과 첨언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어지간한 말에는 빙그레 웃으며 넘어가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아직까지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람이 있다. 남편의 어머니, 올해 일흔셋 되신 시어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시어머니는 내 주변인들에게 ‘쿨한 분’으로 통한다. 그녀는 남편이 중학생이 되던 시절부터 혼자서 아들딸을 키워냈고, 남매가 이십 대 초반을 넘기고 나서는 ‘이만큼 키웠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생활하거라’ 선언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세상을 유람했다. 명절에도 며느리를 이끌고 외식을 주도한 분이 바로 나의 시어머니다. 평소엔 각자 잘 살다 모일 때 정답게 지내자는 게 어머님의 모토다. 그런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우리의 비출산 결정도 지지해주실 거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비출산 결심을 양가에 말씀드릴 때에도 친정은 내가, 시가는 남편이 전담했다.
남편은 비출산 선언에 시어머니가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내심 걱정하던 터라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당시 우리는 제주도에 살고 있었는데 명절이면 시어머니가 여행을 겸해 일주일 정도를 와 계시곤 했다. 어머님이 내게 처음 ‘내색’을 하셨던 건 결혼 2년 차 추석 연휴였다. 남편은 밀린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남편을 대신해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덕 바닷가로 향했다. 함덕의 푸른 바다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희는 정말로 아이 가질 생각이 없니?”
아 맞다.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대놓고 말하는 걸 선택하는 분이셨지. 나는 잠깐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비출산에 대해 남편과 결혼 전부터 쭉 이야기를 해왔었고, 두 사람 생각이 일치한다고. 아직 신혼이라 아이를 갖지 않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비출산 부부로 살고 싶다고. 아이 없이도 저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이해해주셨으면 한다고. 내 이야기를 듣던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도 걔(남편)를 네가 설득하면 되지 않겠니?”
설득은 다른 편의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 쓰는 도구다. 남편과 나는 둘 다 비출산 진영에 있는데 어떻게 설득을 한단 말인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시어머니께 다시 말씀드렸다. 어머니, 저희 둘 생각이 같아요. 그러자 시어머니는 ‘네가 마음을 고쳐먹고 설득을 하면 남편도 따를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셨다.
그때 알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비출산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걸. 타인에게 우리 결정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가족은 얘기가 달랐다. 시간과 품을 들여 풀어갈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처음 아이 이야기를 꺼낸 날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 세 가지를 다짐했다. 길게 보자.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열심히 설명하자. 그리고 최대한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그 날 이후에도 시어머니는 제주에 오실 때면 가끔 아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럴 때면 나도 지치지 않고 ‘저희 결심은 변함이 없으며 둘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목표’라는 말을 해드렸다. 우리 부부의 노후를 염려하시면 따로 들어둔 연금을 알려드렸고, 공동 관심사를 걱정하시면 스노클링부터 게임까지 남편과 나의 수많은 공동취미를 알려드렸다.
시어머니께 빈말을 한 적은 없다. 남편과 나의 생활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다만 시어머니가 오실 때면 특히 신경을 썼다. 주말 낮이면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거나 올레길을 거닐었다. 와인을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위해 마트에서 포도주를 사다 놓고 밤이면 둘러앉아 한 잔씩 마시며 사는 얘길 나눴다. 남편과 내가 요즘 하는 일이 무언지, 최근에 여행한 어디가 특히 아름다웠는지, 둘이 사는 게 얼마나 깨가 쏟아지는지. 자랑엔 영 소질이 없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프로 자랑꾼’이 됐다. 그렇게라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둘이서도 충분하다는 걸.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보내고 차츰 시어머니의 입에서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 횟수가 줄어갔다. 그래도 5년 차까지는 넌지시 ‘계획은 없냐고’ 입에 올리셨던 것 같은데 횟수가 점차 줄더니 2~3년 전부턴 그마저도 고요하다.
2021년의 첫날이던 1월 1일에는 시어머니의 초대를 받아 시가에 갔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두신 떡국과 수육을 배부르게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시어머니 아들을 칭찬하다가, 흉도 보다가 했다. 남편이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시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정말 잘 만났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둘이 오손도손 살면 무슨 걱정이니.”
나는 시어머니의 이 말씀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였다. 비출산을 선택한 아들 내외에게 해주는 일종의 덕담으로. 그도 그럴 것이 둘이서 잘 살면 된다는,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신 게 결혼생활 9년 만에 처음이다. 이만큼이나 오래 걸렸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만큼 이해해주시는 게 어딘가 싶다.
출산과 육아는 부부 당사자 간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어머니의 ‘이대로 잘살라’는 응원을 얻어낸 게 못내 기쁘다. 응원도 악담도 가족에게 나온 건 힘이 세다. 타인의 응원을 받으면 잠깐 기분이 좋지만 가족의 지지를 받으면 뱃심이 두둑해진다. 더구나 은근히 아이를 원하시던 시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마음이 든든했다.
참고로 내가 들어본 비출산 오지랖 중 이런 질문도 있었다. “시부모님은 허락하셨어?” 부부 당사자간 합의가 있는데 왜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건지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말이다. 앞으로 그 질문을 받게 되면 이렇게 답 해야겠다. “응원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