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도부터 공기업까지... '탈 방송'한 그녀들
얼마 전 20여 년을 한 방송국에서 일한 작가 선배가 퇴직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방송 제작이 중단되며 타의에 의해 떠나게 된다는 사연이었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내내 마음이 쓰였다. 그녀의 20년은 어땠을까. 그녀가 상상한 결말은 이런 방식이었을까.
잠시 망설이다 메신저를 열어 작가 선배의 이름을 찾았다. 기프티콘에 응원을 얹어 보내고 나니 마음이 그나마 덜 신산하다. 대화창을 닫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작가가 현직에서 전직이 되는구나.
나는 방송작가로 살면서 총 세 곳의 방송사를 거쳤다. 여러 곳을 거치며 좋은 인연도 여럿 만났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선후배들을 떠올려보니 현직보다 전직이 많다. 우리가 벌써 퇴직을 할 나이는 아닌데 이상하다. 한창 일할 30대 아닌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많던 방송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총명하고 일 욕심 많던 A는 작가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경제학도가 됐다. 총명하고 일 욕심 많았기에 A는 방송작가 시절 늘 괴리감에 시달렸다. 방송국이 작가들과 계약서를 써주지 않던 때, 그녀가 나서서 사측에 계약서를 쓰자고 요청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재원이던 부모님 덕에 유년기를 중국에서 보냈던 A는 중국어에 능통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상사는 그녀에게 중국어 번역 업무를 추가로 지시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방송작가 겸 번역가로 일해야 했다. 업무는 추가됐지만 급여는 100원도 오르지 않았다. 일의 보람과 뿌듯함만으로 모든 걸 다 참고 견딜 수는 없었다. 결국 A는 방송사를 떠났다.
참을성 많던 B작가는 늘 인내했다. 갑작스레 프로그램에서 하차해도 참고, 업무량이 과다하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옮겨가서도 참았다.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집에 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해졌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먹고, 씻고, 잠을 잤다.
한 번은 B작가의 어머니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녀의 어머니는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딸이 집에도 오지 않고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마음을 졸이셨다. 나는 어머니를 달래 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방송국 숙직실에서 자고 있을 겁니다.” 예상대로 그녀는 숙직실에서 곤히 자느라 어머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런 날들이 누적됐다. 결국 B는 병에 걸려 방송사를 떠났다. 퇴직 이후 그녀는 카페에서 일하며 건강을 돌봤다. 그녀에게 다시 방송작가로 돌아올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재기 발랄하고 일이 즐겁다던 C작가. 그녀는 갑작스럽게 프로그램이 공중분해되면서 갈 곳을 잃었다. 사측은 미안하게 됐다며 다른 프로그램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 털고 나오는 길을 택했다. C는 당장 언제 잘릴지 모르는 방송작가 명함을 반납하고 공기업에 취업했다. 그녀는 방송작가를 하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렸고, 배우고 싶었고, 바꾸고 싶었다.” 모두 과거형이다. 나 역시 그 시절 어렸고, 배우고 싶었고, 바꾸고 싶었기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했다. 우리는 왜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으로만 방송을 회상할 수밖에 없는 건지.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현재형의 인물, D를 찾았다. D는 경기지역 한 방송국에서 일하는 현직 작가로 누구보다 방송 일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D는 방송은 물론이고 방송을 함께 만들어가는 게스트와 스태프들까지 살뜰하게 챙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평판과 인망이 올라갔다. 그런 그녀에게도 고통이 있었을까. 나는 D에게 방송작가로 살면서 어떤 게 가장 힘드냐고 물었다. 그러자 명확한 답이 돌아왔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제대로 항변할 수 없는 것.” 참고로 그녀는 2021년 현재도 계약서 없이 구두 계약만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녀가 15년을 일한 베테랑 작가여도, 아무리 인망이 높아도 피디가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하면 그걸로 끝이다. 15년간 방송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요즘 D는 한 번씩 방송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누구보다 방송을 좋아하던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의외였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할 거야. 그런데 이젠 손에서 방송을 놓는 일도 상상할 수 있겠더라고.” 신입시절 누구보다 열정 넘치던 ‘방송쟁이’ 작가는 15년의 세월을 보낸 뒤 세상사에 해탈한 도인이 되어있었다.
총명하던 작가는 경제학도가 되고, 인내하던 작가는 몸에 병을 얻어 퇴직하고, 재기 발랄하던 작가는 고용불안에 지쳐 공기업으로 날아갔다. 방송가에서 15년을 버텨낸 작가는 아직도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한다. 방송의 화려한 장막을 한 겹 걷어낸 현실이 이렇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허탈하다.
방송계 프리랜서는 누구나 다 불안과 벗하고 산다지만 그중에서도 방송작가 직군은 좀 특이하다. 유독 제 발로 떠나는 이직률이 높다. 많은 작가들이 방송 제작 현장에서 ‘굴러본’ 뒤 다른 길을 택한다. 일이 싫어서 떠났다는 사람은 손에 꼽힌다. 대다수가 고용구조와 노동환경에 절망한 뒤 떠난다. 이직률이 높아도 방송사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사람을 갈아 넣고 나면 또 다른 젊은 지원자가 줄을 선다. 방송을 열망하는 이들을 데려와 탈진하고 나면 눈 깜박할 사이에 새로운 사람을 뽑는다. 간편하고 비정한 자본의 해법이다.
요즘은 방송가의 행태가 소문난 건지 신입 작가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현장에서 3개월 일한 뒤 그만두는 작가들도 부쩍 늘고 있단다. 왜 아닐까. 체력과 열정을 쪽 빨리고 나면 껍데기만 남은 채로 짐을 꾸려 떠나는 선배를 신입도 똑똑히 봤을 텐데.
방송을 사랑하던 이들이 방송으로 인해 더 이상 방송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암담하다. 밤을 새 가며 프로그램을 만들던 내 동료, 선배, 후배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안정을 찾아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을까. 먼 나라로 유학을 갔을까. 경력단절을 겪고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가끔 자신이 만들던 방송을 보기는 할까.
이제 나는 2,30대 한창의 방송가 현직들이 꿈을 꺾고 전직으로 바뀌는 걸 그만 보고 싶다. 그들에게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인 채로 남길 바란다. 이젠 방송가도 각성할 때 된 것 아닐까. 섭외하고 구성하며 행복해하는 ‘방송쟁이’들이 이탈하기 전에, 그녀들의 ‘탈 방송’ 선언이 줄줄 이어지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