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양과자 기억
내겐 이모가 다섯 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참 기력도 좋으셨지... 다섯 이모 가운데서도 전주에 살던 넷째 이모(편의상 전주 이모라고 하겠다)를 떠올리면 코끝에 달콤한 계란 반죽 냄새가 스친다. 갓 구워낸 카스텔라의 향을 알게 해 준 사람이 바로 전주 이모다. 시판 카스텔라에서는 그저 단내가 날 뿐이지만, 집에서 직접 머랭을 쳐 오븐에 넣은 카스텔라 반죽 냄새는 차원이 다르다. 온 집안에 달고 고소하고 폭신폭신한 미풍이 분다. 전주 이모가 아니었다면 나는 신선한 카스텔라 반죽이 익어가며 풍기는 냄새를 알지 못했을 거다.
전주 이모는 늘 요리를 좋아했다. 1990년대 지방도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가스오븐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큼직한 가스오븐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이모가 부린 유일한 사치였을 것이다. 이모는 가끔 짬이 생기면 양과자를 구웠다. 카스텔라부터 체크무늬가 새겨진 쿠키까지, 이모의 손을 거치면 달콤하고 고소한 것들이 마법처럼 생겨났다. 내 최초의 ‘서양식 디저트’ 미각은 전주 평화동의 한 아파트에서 자라났다.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이모와 함께 살아봐서다. 12살이 되면서 엄마는 나를 전주 이모 집에 맡겼다. 이유를 묻는 내게 엄마는 “도시에 가서 공부 잘하라고 보내는 거야.”라고 답했다. 나는 엄마의 불긋한 눈두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가기 싫기도, 가고 싶기도 했다. 나는 아직 엄마가 너무너무 필요한데, 엄마는 그걸 모르는 걸까. 냅다 서운하다가도 밤이면 들리던 파열음과 고성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은밀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전주 이모 집에 ‘맡겨진 자식’이 되었다.
그때 내가 열두 살이고 엄마가 서른여섯이었으니 이모는 서른셋쯤 되었을까. 지금 내 눈엔 서른셋도 애긴데... 애가 애 둘을 키우는 것도 모자라서 남의 집 큰애까지 맡다니. 심지어 나는 쉬운 애도 아니었다. 예민한 성정에 잦은 전학, 부모의 불화 3종 세트로 세상에서 지가 제일 불행한 줄 아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기억력을 풀가동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내 장점을 찾아본다. 그래도 조용하고... 조용하고... 밥을 잘 먹었다.
말 없고 늘 죽상을 하고 있는 조카라서 이모는 음식으로 내 기분을 가늠했던 것 같다. 우중충하게 있어도 밥은 늘 싹싹 비웠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을까. 이모는 어쩌다 내가 밥을 두어 수저 남기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무슨 일 있냐”라고 물었고, 밥을 한 공기 더 청하면 얼굴이 환해졌다. 식사 시간 말고도 이모는 가끔 사촌동생과 나를 주방으로 불렀다. 나가보면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푼에 계란이 담겨있거나, 큼지막한 버터가 깍둑썰기 되어있거나 했다. 눈이 동그래진 우리에게 이모는 “지금 뭐 만들거냐며언~”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이모는 카스텔라를 만들 거라고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베이킹이 흔한 시대가 아니었다. 전동 핸드믹서도 블랜더도 없던 시절, 팔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저어야 머랭이 완성됐다. 이모는 중노동은 자기가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놀이가 될 법한 소일거리만 시켰다. 재미 삼아 한 번 크림을 저어 보게 한다거나,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밀가루를 섞게 하는 것들을. 매사 뚱한 먹보 조카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놀이가 어디 있을까.
완성한 카스텔라 반죽을 중탕해서 오븐에 넣고 나면 후각이 깨어난다. 호화된 밀가루와 설탕, 거품 낸 계란이 부푸는 냄새는 세상에서 가장 시큰둥한 아이도 달뜨게 만든다. 마침내 오븐에서 땡 소리가 나면 이모는 우리를 불렀다. 나와 사촌동생이 보는 앞에서 이모는 카스텔라를 꺼냈다. 잘 구워진 카스텔라는 표면이 살짝 출렁였고 황금빛이 도는 갈색 껍질에 윤기가 흘렀다. 이모는 조심스럽게 카스텔라를 잘라 접시에 담은 뒤 반드시 조카인 내 앞에 먼저 놓아주셨다. 폭신한 카스텔라를 한 입 먹고 우유를 마시면 케이크가 솜사탕처럼 입 안에서 녹았다. 막 오븐에서 꺼내 뜨거운 카스텔라는 몇 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이 크고 나누는 걸 좋아하는 이모는 카스텔라를 세숫대야만 한 양푼에 반죽했다. 오븐을 몇 번이고 돌려 넉넉하게 구워 온 가족을 먹이고 이웃들에게도 나누었지만, 첫 접시는 예외 없이 내 차지였다. 예민하고 소심한 조카를 위한 ‘특별대우’였음을 이제는 안다. 이모 음식을 먹고 나는 키가 한 뼘이나 컸다.
홈메이드 카스텔라와 쿠키로 미각을 키운 조카는 훌륭한 빵순이로 성장했다. 전국 팔도 여행을 가면 유명한 빵집은 반드시 가봐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도 모자라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홈베이킹을 시작했다. 야금야금 도구도 갖춰나갔다. 지금은 딸기 쇼트케이크부터 애플파이까지, 어지간한 메뉴는 스스로 만들어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만들지 않는 양과자가 있는데 딱 하나, 카스텔라다. 카스텔라만큼은 전주 평화동의 구형 가스오븐이 내는 맛을 따라가지 못할 거다. 그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