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도 아는 꿀팁
자동차 한 대에 네 명의 방송국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카메라 감독이 앉았고, 조수석에는 작가가 앉았다. 뒷좌석에는 PD와 아나운서가 자리했다. 이 차량이 다른 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은 촬영을 나가다 사고를 당했다. 여기서 문제. 네 사람 가운데 산재처리를 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한 프리랜서 작가다. 작가의 자리에 VJ나 리포터가 들어갔어도 마찬가지다. 방송사가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직군은 업무와 관련된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려도 자비로 치료해야 한다.
이 ‘자동차 사고 괴담’은 도시전설이 아니다. 실제로 누군가 겪었던 일화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방송 일을 하는 동안 절대로 다치거나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일하다 다치면 산업 재해는커녕 부품처럼 갈아 끼워질 수 있으니 늘 조심해야 했다. 나는 상근하던 방송국의 내 책상에 각종 약병과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간식거리를 넉넉히 쟁여두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방송사는 나와 관련된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휴가도 줄 필요가 없었고 정년도 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늘 내가 나를 챙겼다. 공복이 길어질 것 같으면 칼로리 바를 먹었고, 위가 콕콕 쑤시는 것 같으면 양배추 성분이 들어있는 알약을 삼켰다. 아프지 않고 오래 일하기 위해 늘 조심했다.
하지만 조심은 조심이고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유명한 어록도 있지 않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이라고. 나 역시 80세 생일을 라디오 부스 안에서 맞고 싶다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삶에 ‘쳐 맞기’ 전 까지는.
방송가에서 프리랜서로 살다 보면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 순간은 하나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한 지역 방송의 리포터에게는 갑작스러운 해고로, 10년 경력의 용역 VJ에게는 폭행과 폭언으로, 의욕 넘치는 신입 조연출에게는 최저시급만도 못한 급여로, 어느 운 나쁜 취재작가에게는 산재 없는 교통사고로 온다. 그 순간은 잘 벼려진 칼에 자상을 입는 일과도 비슷하다. 베이는 순간엔 자각하지 못하다 소매가 흥건하게 젖은 뒤에야 흐르는 피를 느낀다. 칼을 든 사람은 이미 지나갔고 남겨진 것은 나와 내 상처뿐이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방송가 프리랜서들에게는 주어진 선택지가 '침묵' 하나뿐이었다. 이 선택지를 따르지 않으면 추방됐다.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 늘 지척에 있었고, 프리 인력을 자르는 건 머그컵을 바꾸는 일만큼이나 간단하고 신속했다. 신입 프리랜서들은 업무보다 무력감을 빨리 배웠다.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사라는 세상 안에서도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싸워볼 수 있는 사람들, 싸움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정규직 PD나 계약직 아나운서처럼 노동자로 분류된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이라는 둥지가 있었다. 노조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저지선이 되어주었다. 극단적인 예로 계약직 방송사 직원이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하면 적어도 갈 곳이 존재했다.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할 창구가 있었다. 소속도 노조도 없는 프리랜서는? 침묵하며 고통을 견디거나 떠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문제제기를 위해서는 혼자 시간과 비용을 들여 변호사를 찾아가야 했다. 문득 2,30년을 방송사 안에서 프리랜서로 버텨온 작가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119가 올 때까지 일을 했고 응급실에서 자막을 뽑았다는 선배, 출산 3주 만에 부랴부랴 복귀했다는 선배. 그 시절 선배들은 얼마나 많은 일을 묵묵히 견뎌야 했을까. 그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제 다 굳은살이 되었을까.
세상이 변했고 사람이 변했다. 방송사만 그대로다. 방송계 프리랜서들은 이제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노동인권 감수성을 싹 틔우는데 방송국만 고여 있다. 아래에서는 벌써 개혁이 시작됐는데 위는 꿈도 꾸지 말라며 빗장을 걸어 닫는다. 그 빗장, 한 번 열어보자고 패기 있는 작가와 스태프, 연기자들이 알아서 모였다. 방송작가들도, 방송연기자들도, 뮤지션도, 공연예술인도 스스로 노동조합을 구성했다. 이들은 말한다. 1980년대 수준으로 정체된 원고료도, 일하다 사고가 나면 자비 치료를 해야 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고.
주변에 노조라는 단어만 들어도 멈칫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방송에서 오래 일한 프리랜서들이 더 그렇다. 학습된 무기력과 반복된 부당 대우가 몸을 사리게 만든다. 노조에 들기만 해도 ‘미운털’ 박혀 잘리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는 이들을 본다. 나라고 그 두려움을 왜 모를까. ‘미운털’이라는 게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일 수 있는지, 결정권자의 기분에 따라 직이 사라지는 경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도 겪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노조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송가 프리랜서에게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은 어떻게든 오고야 마니까. 사실 노조가 필요한 순간은 순풍이 아니라 격랑 속에 있을 때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누군가 내 삶으로 나를 때리고 있는 것’ 같을 때를 위해 노조가 있다. 우리는 선택하면 된다. 함께 바람에 맞설 것인지, 오롯이 혼자 감당할 것인지.
나는 시기가 맞지 않아 전직이 되고 나서야 방송작가유니온에 가입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노조원이 아닌 소액 후원회원에 더 가까운 셈이다. 전직 방송작가가 노조에 가입해 얻는 게 뭐냐고? 수많은 ‘최초’를 목격하는 기쁨을 누린다. 지난 3월 20일에는 한 유명 방송사의 해고에 방송작가노조와 손잡고 맞서던 두 뉴스 작가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부당해고도 인정돼 복직이 예정됐다.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된 최초의 사례다. 2020년에는 다른 거대 방송사 보도국 작가의 퇴직금 체불 진정에 최초로 지급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런 최초를 자꾸 본다. 현직에게는 용기가 될 테지만 내게는 이런 일들이 위로다. 과거의 나를 향한 일종의 위무다. 이런 최초가 쌓이다 보면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근거 있는 믿음을 품는다. 방송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영화계에서도, 출판과 공연, 음악과 게임, 웹툰과 타투 업계에서도 노조가 구성됐다. 오늘도 ‘최초’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분주하다.
여기 노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좋은 직업을 원하는가. 누군가 내 뒤를 든든하게 봐주기를 바라는가. 나라면 노조에 가입하겠다.” 2015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노동절을 맞아 한 말이다. 노조의 필요성은 미국 대통령도 안다. 직업의 개수만큼 노조의 개수가 존재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일하는 모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