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에서 옹호자로, 옹호자에서 당사자로
서울에서 일하는 방송작가들에게 상암동은 행성이다. MBC, tvN, YTN, JTBC, TBS처럼 규모가 큰 방송국들이 자리하다 보니 많은 작가들이 위성처럼 상암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한 때 나도 매일 경기도에서 상암까지 길에서 3시간을 써가며 출퇴근했었다. 그런 내가 상암에 출근이 아닌 1인 시위를 하러 오게 될 줄이야. 광장에 서서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방송국이 두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새삼 방송사는 너무 크고 그 앞에 서있는 나는 하릴없이 작았다. 잘 닦인 방송국 유리벽이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시작은 사소했다. 한 방송사에서 갑작스럽게 해직된 뒤 나는 방송가의 노동권 이슈에 예민해졌다. 관련 뉴스나 소식을 가끔 찾아보게 됐다. 자료를 찾아보며 알게 됐다. 방송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손쉬운 해고’를 한 번쯤 겪었다. 흔해선 안 되는 일이 흔해져 있었다. 그날도 기사 하나를 보고 마음이 복잡하던 참이었다. 지난 2020년 6월 상암동의 한 방송사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두 명의 방송작가, K 씨와 L 씨가 갑작스럽게 해고됐다. 사측은 전화 한 통으로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계약서상 계약 기간이 6개월 남은 시점이었다. 해고 사유는 프로그램 개편과 인적쇄신이었다.
두 작가가 어떻게 일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일화가 있다. K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에도 생방송을 위해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그런가 하면 L 씨는 출근시간 빗길에 미끄러져 큰 사고를 당했다. 차를 폐차해야 할 정도였지만 에어백이 터져 걸을 수는 있었다. L 씨는 병원이 아닌 회사로 향했다. 그녀는 생방송의 무게감을 익히 알고 있었다. 회사를 가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그 책임을 생각하면 아득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이 움직이는 한 회사에 나갔다.
아버지 상중에도, 차가 폐차돼도 10년을 매일같이 출근한 작가들이다. 이들이 전화 한 통으로 마이크 치우듯 치워져야 하는 존재일까. 돕고 싶은 마음에 관련 소식을 더 찾아봤더니 방송작가유니온과 동료 작가들이 K 씨와 L 씨를 위해 상암동 방송국 앞 광장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한단다. 마음이 동했다. 에그 타르트라도 사들고 광장에 가야겠다 싶었다. 메신저로 방송작가유니온에서 활동하는 H작가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님, 내일도 1인 시위 진행되나요? 저도 응원차 가겠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직접 시위를 해주시는 건 어때요?”
찰나지만 망설였다. 작게 응원만 하려던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중적인 사람이다. 플라스틱 배출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배달 음식을 종종 주문하고, 공정 무역을 지지하면서도 카페는 맛과 분위기를 우선해서 찾는다. 방송가 노동권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변방에서 글 쓰고 응원만 해왔다. 광장에 나가 1인 시위 당사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부끄러운 일이나 그 부끄러움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지금이 부끄러움을 약간이나마 덜어낼 첫 번째 기회라고 누군가 시그널을 보내는 듯했다. 이제 관찰자나 옹호자가 아닌 당사자가 되어볼 차례라고. 여기까지 생각한 뒤 H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1인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사실 멀리서 보면 대단치 않은 일이다. 그저 방송사 앞에서 커다란 패널을 들고 서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상암 복판에 서있을 생각을 하니 밤에 왜 그리 잠이 오지 않던지. 누가 쫓아내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면 어떡하지. 시답잖은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었다. ‘시위’라는 단어의 위세에 기가 눌린 밤이었다. 4시간쯤 선잠을 자고 부스스 일어났다. 1인 시위라는 걸 해본 일이 없으니 준비물도 몰라 단출한 차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경기도 집에서 강남까지, 강남에서 상암까지 빨간 광역버스를 갈아타는 코스는 익숙하다. 과거의 출근길이 오늘의 ‘시위길’이 되다니, 인생 대체 뭘까 따위의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상암에 도착했다.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나쁨’을 기록한 날이었다. 나는 KF지수가 높은 마스크를 쓰고 나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H작가를 기다렸다.
지난 3월 11일 오전 11시 30분, 유동인구가 적지 않은 상암의 광장에서 1인 시위가 시작됐다. 나는 “일시킬땐 직원처럼, 해고할땐 프리랜서”라는 문구가 크게 박힌 패널을 들고 방송사를 등진 채 섰다. H작가는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돌리는 중책(!)을 맡았다. 커다란 패널을 주체 못 해 주춤거리는 내게 H작가가 말을 걸었다. “어색하시죠?” 역시 연애든 시위든 안 해본 사람은 티가 나나보다. “2분만 주시면 괜찮아져요.” 너스레를 떨고 나니 정말로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간밤의 걱정이 무색하게 시위는 안전하고 평화롭게 진행됐다. 초반에 방송사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동의를 구하고 내 사진을 찍어가긴 했지만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방송국 밀집 지역’의 광장에 있으니 방송 종사자들이 자주 내 앞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걸어갔다. 가끔 흥미를 갖고 패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종종거리며 유인물을 돌리는 H작가는 사람들의 거절에 단련이 된 모양새였다. 나는 몸통만큼 커다란 패널을 두 개나 들고 있었지만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흡사 투명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라 조금 당황했다. 방송가의 부당 해고가 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흥미를 잃은 걸까. 아니면 노동환경이 열악해 격무로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는 걸까. 눈앞을 스쳐가는 이들 중 프리랜서는 얼마나 될까. 방송국 앞에 외딴섬처럼 서서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유인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바쁘게 걷던 이들이 K 씨와 L 씨의 사례를 읽느라 걸음을 늦췄다. 눈을 맞추면 행인들이 부담스러워할까봐 애써 먼 곳을 응시하던 나는 자꾸 눈이 바빠졌다. 주변시로 살펴보자 일견 무관심해 보이던 사람들의 미세한 반응이 보였다. 유인물을 읽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생각에 잠긴 사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일행에게 “이 이야기 좀 보라”며 권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내가 붙들고 있는 패널과 H 작가가 돌리는 유인물을 통해 K 씨와 L 씨의 사연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눈앞에 생겨났다. 나는 무언의 전달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안도했다.
그때 내 시선이 닿는 정면 건물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언 땅에 움 터 모질게 돋아.’ 김민기의 노래 <두어라 가자>의 가사였다. 이 가사를 그대로 두 작가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아직 땅은 얼어있지만 언젠가 움이 모질게 돋아날 거라고. 1인 시위를 마치면서 글판 사진을 한 장 찍어 저장했다. 내게도 오래 기억될 가사가 될 것 같았다. 후에 찾아봤더니 <두어라 가자>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노동운동 ‘동일방직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43년이 지났다.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1978년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다 노조를 구성했다고 해고된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해도 출근했지만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된 방송작가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을까.
30대 후반이 되면 세상을 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배운 건 하나 있다. 언 땅을 녹이기 위해서는 여럿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것. 시위는 18일까지 릴레이로 이어진다.
사실 두 작가는 지난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지만 ‘각하’결정을 받았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오는 3월 19일(금)은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 심문일이다. 두 작가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언 땅에 움이 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요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