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그저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by 그레이숲풀

그들은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18년 지기 친구에게 브런치북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고 연락을 취했다.

만약 사과받지 못하고 내가 준 상처에만 집중하며 친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그리하여 관계가 파탄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에세이를 쓰며 이미 드러난 상처를 계속 키우면서는 더 이상 잘 지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숨기기에는 친구를 기만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하면 내가 견딜 수 있을지 자문했을 때, 자존감이 현저히 낮았던 그때와 달리 내 마음은 견딜 수 있겠다고 대답했기에 상처를 친구에게 드러내기로 했다.


만나기 전날, 메모장에 아주 긴 글을 적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들려줄 내 마음을 드러낸 글, 마치 스크립트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고도 친구와의 연이 끊어진다면 그것은 마땅히 견딜 수 있지만, 오해로 인한 파탄은 원치 않았기에 그렇게 긴 글이 탄생했다.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친구와 만나 몇 시간이 지난 후, 나와 친구는 한참을 울고 웃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미안했고 고마워했다.




웹툰 속 주인공과 참으로도 비슷했던 나는 친구 외에도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받아야 할 대상이 더 있었다.

악의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유로 필터 없이 상처를 주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신체적 단점들을 지적하며 늘 숨기기를 강요하셨다.

결코 단 0.0001%의 악의도 없었다.

드러내면 호감을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그릇된 사랑의 표현일 뿐이었다.


결혼도 늘 강요하셨다.

내 또래의 여느 부모님과 다르지 않은 강요이기는 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기에 문제였다.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라곤 없는 내가, 그래서 나 하나를 건사하기도 힘든 내가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잘 이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잘 알았다.

누굴 만나고픈 마음도 없었지만, 그 상태로 만난다한들 어른 아이로 커가며 고통받았던 또 하나의 나를 낳고 키우게 될까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모르시기도, 또 안다 해도 그럼에도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었을 터.

도가 지나칠 정도로 결혼을 이야기하셨다.


예전의 나라면 마음 약한 어머니께 큰 상처가 될까 봐 사랑의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리지 못해 참고 그 참았던 화가 잘못 폭발되었을 테지만, 이때의 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처럼 이제는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사랑의 가면을 쓴 악담을 하실 때마다 아주 차분하게 조곤조곤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좋은 의도라는 것도 잘 알지만 어떤 이유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드렸다.

처음엔 많이 당황하시는 것이 보였다.

그럴수록 더욱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렸다.

사랑의 뜻임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도 계속 알려드렸다.


아쉽게도 여전히 컴플렉스를 고치라고도, 결혼 이야기도 하신다.

하지만 상처를 주려는 말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도록 돌려 말하시고, 나 역시 크게 상처가 되지도 않는다.




웹툰과는 다르지만 내게는 상처의 대상이 더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술만 마시면 온갖 불만을 말씀하시며 새벽까지 우리 가족을 붙잡고 호소하셨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렇게까지 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셨을지 알기에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그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술 약속이 생겼다는 아버지의 말만 들어도 이미 불안증세는 시작되곤 했다.


역시, 아버지께도 상처를 드러낼 때였다.

취하지 않으셨을 때, 솔직히 말씀드렸다.

예전처럼 많이 그리고 자주 드시지도 않고, 아주 간혹 많이 드신 날이 있더라도 과거처럼 하는 일은 드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너무도 두렵다며, 가능한 취기 없이 오셨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술을 마실 필요가 없을 정도록 걱정 없는 삶을 선사해드리지 못함에 죄송한 마음도 드러냈다.

이미 우울증이 있었음을 이야기한 후라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신기하게도 그 이후 아버지는 거의 술을 끊은 것처럼 확연히 줄이셨다.



그들은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혹은 사랑이나 걱정, 서운함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내 인생의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면, 그래서 주체적으로 내 상처를 바라보고 치유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전 11화상처 줄까, 그리고 상처받을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