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표 정도면 그래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장에서의 성공은 그냥 거기까지인가 봐요."
그 전날 새벽 3시까지 검찰조사를 받은 한 대표와 연구소장의 조사 내용을 랩업하는 조찬회의에 최 상무와 팀장들이 간 사이, 워룸에 남아있던 김 매니저가 창밖을 보다 갑자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와 나는 평소 서로 말할 일도 없는 사이였는데, 어느새 한 방에서 무거운 공기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솔직히 우리한테 싼 부품대라고 난리쳤다는 K사 임원들도 다 월급쟁이들이 위에서 시키니깐 그랬겠죠. 어디나 월급쟁이들한테 회사는 다 그런거니깐."
대한민국, 아니 전세계의 직장인들은 다 비슷한 일들을 겪고 있을까. 어떤 사안에 대해 내 생각, 의견을 피력하다가도 결국은 위에서 결정한 것을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게 우리들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위에서의 결정' 이란 것은 어떤 근거로 이루어지는걸까. 위에서의 결정을 내린 그 사람은 또 그 위에서의 결정을 따른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위의 위는 무엇 때문에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따르라고 하는거지. 그 위의 위의 위는?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이걸 생각하고 궁금해하는게 의미가 있는걸까. 아무래도 카페인이 필요한 타임인거 같다.
"근데 K사 CEO도 조사 받았다던데요?"
카페인 보다도 김 매니저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분명 K사 대표도 조사는 받았다는데 우리 대표처럼 검찰청에 들어가는 모습이 어느 방송,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우리 대표가 조사를 받고 나오는 새벽 3시까지 검찰청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다 질문을 쏟아낸 기자들이었는데, K사 대표가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은 한 대표 조사 기사의 가장 마지막, "한편"으로 시작되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창문도 없는 워룸에선 L타워가 잘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건물 밖의 빛이 보이지 않다보니 시간의 흐름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창 밖의 빛이 문제라기 보단, 회사의 공식사과문이든 입장문이든 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대표를 중심으로 한 의견과 섣불리 움직여선 안된다며 의사결정을 자꾸 미루는 본사와의 의견을 조율하는 회의만 매일 2시간 이상씩 하는 중이라 요일도 시간도 망각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B한국지사, 유한책임회사로 법인 형태 바꾸는 꼼수로 구설수, 외국계 회사 조사 철저히 해야"
책상에 앉아 졸고 있을 수만은 없어 커피를 타러가려는 순간, 노트북 우측하단에서 뉴스 기사 알럿이 울렸다.
"최근 K사 엔진부품 화재로 물의를 빚고 있는 B 한국지사가~"로 시작하는 기사에는 우리 회사가 기업경영내용을 외부에 공시하지 않기 위해 ' 외감법(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의 허점을 이용해서 유한회사에서 '유한책임회사'로 변경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기사 내용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마치 우리 지사가 엔진부품 화재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쓰여진 "K사 엔진부품 화재로 물의를 빚고 있는 B 한국지사"라는 기사 첫 문구가 눈에 거슬렸다.
"섣불리 기자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잘못하면 그 수에 말려들어갈 수가 있어"
"근데 그러면 다른 기자들도 이걸 그대로 따라 쓸텐데요. 이미 이 기사를 복사해가는 언론들도 많고.."
뾰족한 수가 없는지 최 상무도, 팀장도 미간에 주름만 잡은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블로그랑 홈페이지에 이 기사에 대한 것만 반박문을 내면 어떨까요? 유한책임회사로 바꾼건 유한회사 관련 내용이 강화된 외감법 보다 훨씬 이전에 진행된 일이고, 무엇보다도 K사 엔진부품사건은 아직 진위여부가 최종 결정되지 않았다고.."
최 상무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자기 입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자신없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일단은 그 무엇도 대응하지 말라고 한 본사의 가이드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굳이 본사한테까지 컨펌을 요청할 필요 없지 않나요, 상무님? 차라리 대표님께 보고드려 보는게.."
최 상무의 눈치를 살피던 팀장이 발빠르게 그의 마음을 잡아냈다.
"B한국지사, 전년 매출 5,000억, 사회공헌 활동 10억?"
"B사, 한국 진출 당시 본사 비자금 조성했나?"
평소 기자들의 관심을 갖기 힘든 기업이라 좋은 기사던 안 좋은 기사던 1주일에 1번 날까 말까했는데, 이제는 세상의 모든 관심이 다 우리 회사에 몰렸는지 제목에 회사의 이름을 건 온갖 종류의 기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졌다. 이를 일일이 영어로 번역하여 본사에 보고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하지면 여전히 본사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라는 가이드도 주지 않았다. 대표의 컨펌으로 블로그에 게재한 외감법 관련 기사 공식반박문에 대해선 온라인 언론사의 기사로 딱 1건 게재되고 말았다. 해당 기사를 처음 보도한 언론사는 우리의 반박문에 대해선 아예 무시했다. 평소에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할 때 노출이 잘 안되던 회사 블로그였기에, 반박문의 조회수도 매우 낮았다. 그리고 우리 대표의 2차 검찰 조사가 이루어졌다. K사 화재사고 피해자 유족들이 검찰청 앞에서 K사와 B한국지사의 성의있는 사과와 적절한 피해보상을 촉구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이날의 포털 사이트를 장식하였다.
강남 테헤란로, 여의도, 을지로는 날이 갈수록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는 중이다.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외부에 빛이 있을때는 그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외부의 빛이 없을때는 건물 안의 빛으로 거리를 밝힌다. 매일 오가는 출퇴근길이라 지하철역에서 나와 몇분을 걸으면 어떤 카페가 있고, 어떤 편의점이 있는지까지도 훤한 동네이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거리가 낯설었다. 이런 기분은 이직하기 전 직장에서 퇴사하기 1주일 전쯤에 느꼈었다. 3년을 매일같이 다닌 길이었지만, 별일이 있지 않고서야 앞으로는 이 길을 걸을 일은 딱히 없겠지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과 똑닮은 강남 한복판을 걷고 있는데, 남들보다 이른 출근을 해서였을까. 왠지 아득한 기분이 느껴져 괜시리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적막함과 아득함은 김 매니저가 보낸 메세지 알람으로 깨졌다.
"B사 한국지사장 H씨, 노블레스 오브리주 모르세요?"
제목도 자극적이었지만, 내용은 한 대표의 아들이 미국 유학 중 사귀던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 한 대표의 장인어른이 교통법규를 위반했다는 일 등 한대표 가족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사였다. 홍보업계 사람이 아니라면 아예 모를 작은 언론사였지만, 악의로 가득찬 이 기사는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내가 이런 기사를 냈는데, 우리 언론에 광고를 하면 기사를 내려주겠다"는 내용의 간략한 문자메시지가 왔다.
새벽부터 시달렸지만 늦은 밤이 되도록 처리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결론이 날 수 없는 회의, 누군가의 윽박, 무기력한 타이핑 소리만이 워룸을 가득 매웠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본사였지만 그 날도 뾰족한 수를 내주진 않았고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까지 남아있던 한 대표는 무슨 일인지 최 상무와 함께 워룸이 있는 우리 층까지 내려왔다 방 안에 있던 나와 유리문을 통해 눈을 마주쳤다. 만약 한 대표가 늘 입는 각 잡힌 슈트정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지난 검찰청 앞에서 찍혔던 사진보다도 더 작아보일 것만 같았다. 다만 눈만은 특유의 반짝임이 살아있었다. 한 대표는 그 시간까지 남아서 본사와 끝없는 회의를 하고 있는 우리가 불쌍해보였는지 온갖 간식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2일 뒤 나는 한 대표가 사직하고 한국 영업본부장이었던 스미스 전무가 한국지사장 대행을 맡게 되었다는 보도자료를 쓰게 되었다.
검찰은 K사의 전 대표와 B한국지사의 전 대표였던 한 대표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각각 고소했다. K사가 우리 회사를 이번 사고에 관해 자신들이 입은 피해보상을 하라는 민사 소송을 낼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헛소문으로 끝이 났다. 대신 스미스 대표와 K의 새로운 대표와의 만남이 있었고, K사에서 내년도에 출시하는 신규 SUV는 다시 이전처럼 한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법무팀은 국내 최고 로펌을 고용해 지리한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 대표이사가 고소되었지만 결국 회사 이름이 걸린 일이기에 회사의 법무팀이 총 동원된 것이다. 워룸은 이제 법무팀 차지가 되었고, 김 매니저와 나는 다시 L타워가 보이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느새 미세먼지가 걷혀서 L타워가 눈 부시도록 보이는 계절이 되는 사이, 회사 밖에서는 가상화폐가 '떡상'하고 한국가수가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1위를 하는 것이 K사의 화재사건보다 더 중요한 뉴스가 되어 있었다.
"우리 박 매니저님 또 회사일에 영혼 담고 계시네."
가상화폐로 지난 달 30% 수익을 얻었다는 옆자리 후배가 본사와의 회의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내 모습을 보고 이야기하였다. 어차피 승진해봐야 월급 조금 오를 뿐 책임감만 무거워지니, 최대한 지금의 팀 내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가늘고 길게 다니는게 소원이라는 이 후배는 조만간 한 엔터테인먼트사가 주식시장에 상장하니 공모를 준비해야 한다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우리 회사 임원들이야 어차피 본사에서 오거나 외부에서 데리고 오던가 둘 중 하나이고, 운이 좋아 한국 대표이사가 된다고 해도 온갖 책임 덮어쓰고 재판 밖에 더 받아요?"
대외협력팀 김 매니저가 연구소를 다녀오는 길에 농담삼아 한마디 던졌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내가 온갖 언론사들의 필기시험과 면접에서 줄줄이 떨어진 후, 처음 사회에 발을 디딘 곳은 작은 언론홍보대행사였다. 가족같은 분위기의 따뜻한 곳이었지만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렇게 경력직으로 이직한 B한국지사에서 벌써 5년째 일하면서 나름 '언론홍보', '대외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일들이 있으면 회사 사람들이 나를 가장 먼저 찾을 정도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다. 그럼 다음은 어디일까. 나는 지난 3개월간 K사 화재사건을 생각하느라고 정작 내 인생은 생각해본적이 없다. 아니, K사 화재사건 전에도 평일에는 회사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하느라,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고 데이트를 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포스팅을 생각하느라 앞날을 깊게 고민해본적이 없다. 근데, 꼭 앞날, 그리고 다음을 고민해야 하나?
"그래도 한 대표는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한국지사 대표까지 해보았으니 성공한 인생인거죠."
"맞아요, 다 이뤘죠 뭐. 아마 본사에서도 뭔가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은 했을거예요. 우리야 우리 걱정이나 하면 되죠."
그 날 아침 내 눈을 사로 잡은 기사는 약 2달만에 울린 K사 화재사건 관련 뉴스 알럿이었다. 작지만 자동차 전문매체로 매니아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한 언론사에서 K사의 엔진폭발 사고는 부품 문제가 아니라 K사가 신모델에 도입한 피스톤을 압착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문제일수도 있다는 것을 K사 내부 직원 멘트를 인용한 기사를 보도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 아니래도 이 기사를 활용하면 우리 회사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씻을 수 있지 않을까. 팀장에게 흥분해서 보고하던 중 최 상무에게 호출이 왔다.
"내가 B 한국지사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서 몰랐는데 회사에 '비전 인센티브'라는게 있더라고요?"
창 밖의 날씨가 맑아서 그랬을까. 최 상무의 표정이 이리 밝은 것은 최 상무가 1년 전 담당 내 인원들을 모아서 인사하던 날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본사에 내가 특별히 이야기해서 박선영 매니저 이번에 비전 인센티브 받게 되었어요. 아마 포상 휴가도 좀 나오는거 같더라고?"
최 상무는 자기가 포상휴가를 가게 된거마냥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번에 K사 화재사건, 해결하느라 고생 많았잖아. 본사에서도 우리 고생한거 다 아니깐 비전 인센티브 그거 주려면 서류 작업도 많이 해야한다는데 이번에는 본사쪽 마케팅 헤드랑 얘기해서 그냥 바로 처리됐어요."
보고에도 타이밍이 있다. 상대의 기분이 좋을때 하는 보고만큼 좋은 타이밍은 없다. 팀장이 보고하는게 맞는 순서겠지만 지금을 놓치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에 나를 흥분하게 했던 기사에 대해 최 상무에게 보고했다. 이를 이용해서 공식 입장문을 내든, 주요 일간지 기자나 전문 자동차 칼럼니스트들에게 알리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함께 이야기했다. 순간 차가운 것이 최 상무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뭐 지나간 일에 그렇게까지...어제 본사랑 이야기하다 나온 아이디어인데, 우리가 자동차 부품회사로 일반 소비자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까 고민하다가, 인텔이 PC회사들 광고 뒤에 자신들의 로고를 쓰게 했듯이 '자동차를 살때 B 부품이 있는지 확인하세요' 하는 캠페인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걸 박 매니저가..."
K사 화재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인데 최 상무는 이를 '지나갔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회사 차원의 그 어떤 입장표명을 제대로 한 것도, 누군가의 상처를 제대로 씻어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재판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재판의 당사자는 '전(前)' 대표이다.
"일단 휴가시즌 지나고 더 아이데이션 해보자고.포상휴가는 1달 안에 써야 한다고 하니깐 꼭 휴가 다녀오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님."
회사 상사 앞에선 뇌와 입이 따로 놀 때가 있다.
"내가 챙기긴, 다 박선영 매니저가 잘해서이지.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앞으로 1달 안이라면 여전히 여름이니깐 조금 시원한 곳으로 가야겠다. 일본 북해도쪽이 여름에도 시원하다던데, 마침 삿포로 맥주 축제도 있다. 아니면 여름휴가 1주일과 포상휴가 1주일을 붙여서 2주동안 북유럽 같은 곳을 다녀와도 좋겠다. 2주동안 자리를 비우는건 좀 무리이려나? 최 상무가 시킨 일반 소비자 대상 부품확인 캠페인을 3분기부터 시작하려면 8월에는 어느 정도 기획안이 완성되어야 할텐데. 오랜만에 정시퇴근을 하다보니 지하철에 사람이 꽉 들어차있었다. 그래도 퇴근길이어서인지 다들 표정은 밝아보인다.
"참, 다음주에 재판 시작입니다. 재판 자체는 비공개이지만 언론이 다 들어와서 볼 수 있으니 내일은 모니터링에 특히 주의하세요."
북유럽 사진이 가득한 내 스마트폰에 메신저 알람이 떴다. 최 상무는 지나간 일이라고 했지만 팀장에겐 진행 중인 일이다. 근데 우리 팀장은 이걸 꼭 퇴근시간에 보내야 하나. 역시 2주간 휴가는 무리일 듯 하다.
"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 차창 밖으로 L타워가 담고 있는 노을은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