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쇼핑은 어떠신가요? 루키에게 들려주세요"
이미 온갖 상품이미지들로 여백을 찾기 힘든 R mall 쇼핑몰 첫 화면, 택배박스 모양 얼굴형에 나름의 눈과 입을 갖고 있는 루키가 화면 접속자들에게 말풍선으로 나타나 말을 건넸다. 루키는 지난 월요일부터 임직원들에게 베타서비스로 가-오픈된, 요즘 업계의 화두인 챗봇(chat bot) 상담원이다.
"운동화 반품"
밀레니얼, Z세대는 대면 소통을 번거로워하거나 불편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화를 걸 필요가 없는 배달어플, 굳이 오프라인 매장으로 갈 필요가 없는, 집 앞으로 모든걸 배달해주는 마트어플 등 온갖 디지털화된 서비스들이 인기를 끌고 관심을 받는다.
아직은 오프라인의 백화점이 쇼핑업계 주류였던 시절 사회에 첫발을 디딘 진수는 회사생활 20년 동안 이런 시류에 의해 숱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서비스팀'이라는 '디지털' 단어를 달고 있는 팀에 정착하였으니 나름 사내·외 트렌드에 잘 적응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저런,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드셨나요? 루키에게 알려주시면 소중한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에는 더 좋은 서비스와 상품으로 보답해 드릴게요"
챗봇서비스는
1.최근 주요 소비자로 부상한 MZ세대의 행태에 맞고
2.CS센터 인력들이 호소하는 감정 노동에 대응할 수 있으며
3.친근한 캐릭터로 소비자들의 호감도도 높일 수 있는 서비스
라며 6개월 전에 경력으로 R mall에 입사한 정수연 책임이 여러 번의 프리젠테이션으로 팀장은 물론 담당상무, 나아가 경영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운동화 사이즈 에러, 사진과 다름. 반품 원함"
하지만 디지털 서비스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사람이 에러를 잡아야 한다. 디지털을 완성하기 위해선 아날로그의 노가다가 필요하다. 루키가 베타로 오픈한 이번 주 월요일부터 디지털서비스팀원 10명에겐 하루에 100개씩 질문 케이스를 가지고 루키와 대화해서 루키를 학습시키고 에러를 잡으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같은 질문을 각자 사용하고 있는 사무용 노트북, 데스크탑은 물론 스마트폰 기기로도 해야 했다. 덕분에 팀원들은 3일째 밤 11시가 넘도록 야근을 하고 있었다. 진수는 그 중 ‘반품’과 관련된 온갖 케이스의 질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반품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은 고객이 문의하는 것을 처리하는 수준이지만 충분한 머신러닝이 이뤄지면 고객이 묻기도 전에 답을 해줄것이고, 상품을 고르기도 전에 원하는 상품을 먼저 추천해줄 수 있을거라고, 루키의 장래까지 정 책임은 그려주었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말도 잘하고, 서비스 기획도 잘하는 정 책임은 성격도 밝았다. 정 책임은 자신이 괜히 일을 벌려서 팀에 죄송하다는 너스레와 함께 팀원들에게 아이스 커피를 돌렸다.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김 상무 방에 커피를 배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우, 쟤 여우 같지 않아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본인도 임원 후보에 오를 수 있을거라는 기대에 김윤아 팀장이 수연을 보는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연이 오기 전엔 ‘디지털서비스’팀에는 진수처럼 백화점 시절 입사해 15년 이상을 R에서 버틴 책임(5년 전에는 과장, 차장, 부장으로 불리던 이들)이 절반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딱 '받은 일'만 하다가 6시가 되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요즘 아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주거나, 어떤 서비스를 해야한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없었던 차에 김 상무가 전 직장에서 데리고 있던 정 책임을 디지털서비스팀으로 영입하면서 팀에 활력이 생긴 것은 분명하였다.
“그래도 엑셀 잘해서 김 팀장 오른팔이었는데, 정수연 책임한테 밀렸네.”
같은 팀이자 입사 동기인 광민이 담배를 물며 진수를 위로하는건지, 놀리는건지 아리송한 말을 했다.
“밀리긴. 그래도 서비스 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이 와서 팀 먹거리가 생겼으니 좋은거지. 전에는 뭐해야 할지 우왕좌왕했잖아. 팀장이나 상무가 이상한 아이디어 가지고 오는거 검토만 하다 3개월을 그냥 날렸고”
“하이고. 회사 생각하시는 마음이 임원감이십니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일명 “담배공원”은 담배를 피지 않는 진수에게도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하루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어야 하는 1평 남짓의 사무실 책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핑계가 되어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가 향긋하진 않아도 친근하다 보니 기분까지 리프레쉬 되는 것 같았다.
“하긴, 장원기 선배 같은 사람도 있는데. 정 책임 보면서 질투하면 안되긴 하지.”
회사는 시류에 따라 10년 전부터 백화점 사업보단 디지털 쇼핑몰 사업에 집중하였다. 그 과정에서 회사는 백화점 관련 인력 중 입사 15년 이상자에게는 희망퇴직을 권고했고, 10년 이상 15년 미만자는 디지털 관련 부서로 대폭 발령을 내었다. 진수와 광민은 당시 디지털 관련 부서에 배치받았고, 한때 백화점의 수도권 지점에서 부지점장까지 했던 원기는 희망퇴직을 하지 않고 여러 사업부를 전전하다 결국은 디지털서비스팀으로 ‘던져짐’을 당하였다. 이렇게 '던져진' 이들에겐 "적응하지 못하겠으면 알아서 눈치껏 나가라"는 회사의 메시지가 무언으로 전달되었다.
다행히도 나름 엑셀과 숫자에 강했던 진수는 변경된 팀에서도 예산, 매출, 원가 절감, 효과성 예측 등등의 계산을 담당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현란한 엑셀 솜씨로 진수는 디지털 본부 내 팀장들에게 굳은 일을 도맡아 해주는 직원으로 인정을 받았고, 덕분에 올해 신설된 팀에서 새로운 업무들을 보고 익힐 기회를 얻게 되었다. 게다가 동기였던 광민과도 같은 팀이 되면서, 이젠 같이 점심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까지 한 팀에 생기게 되었다.
“회사가 이리 저리 사람 괴롭힌다고 해도 애 생각하면 버텨야지.”
나름 이름있는 대학을 나와 큰 꿈을 꾸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점부터 이 둘의 꿈은 “일단 버티는 것”이 되었다. 혹독했던 IMF 시절, 선배들이 당하는 것을 눈으로 본 세대이기도 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회사가 희망퇴직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던 시기에 새로운 것을 해보겠다며 탈출한 이들의 “밖은 춥다”는 절규가 인생의 좌우명이 된 탓이기도 했다. 어느새 학원비로만 한달에 백만원 이상을 써야 할 정도로 아이가 커버렸는데, 그 생활을 10년은 더 해야할 정도로 아이가 아직은 어리다는 것도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