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 똥은 우리가 치우고, 본인은 또다른 걸로 광을 파는구나.”
오늘의 담배공원에는 박 대리까지 함께 했다. 담배 없이 커피를 마시던 진수의 눈에 매캐한 담배연기 사이로 원기가 CRM 팀장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맡은 일이 생기니깐 신이 나시나 보네”
그 모습을 본 광민이 한마디 덧붙였다.
“세상에 처음부터 완벽한 서비스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씩 찾아내면서 고쳐가는거지. 일단 이제 런칭한 서비스니깐 차근차근...”
처음 기획한 사람은 이제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서비스를 성공시키기 위해 원기가 더욱 동분서주하는 듯 했다.
평소 약속이 많아 직원들과 점심도 잘 먹지 않는 김 상무가 웬일인지 루키 멤버들을 모아 파스타 집을 데려갔다. 당연히 낄 줄 알았던 정 책임과 김 팀장은 자동화 추천 프로그램을 그룹장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식사모임에서 빠졌다.
“요즘 민영 씨 같은 친구들은 점심도 샌드위치로 떼우고 요가하거나 그런다면서?”
“네, 저 오늘도 요가 있었는데 상무님이 파스타 사주신다고 해서 빼고 온거예요.”
“아이고, 고마워라.”
한마디 쏘아붙일줄 알았던 민영도 오늘은 본인이 상무에게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참, 장원기 책임은 개발팀장이랑 친하다면서요? 엄청 깍듯이 대한다던데.”
“요전에 한번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걸 잊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이.”
원기 역시 오랜만에 본인에게 쏠리는 관심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김 상무는 본인이 개발 담당 상무와 이야기를 잘해서 루키 문제를 해결하는데 풀리 서포트(fully support)를 받기로 하였다며 걱정하지 말고 주인의식을 갖고 해보자는 덕담으로 점심자리를 마무리했다.
“결국은 루키에 대한 이런 문제 저런 문제는 다 덮고 자동화 추천 프로그램 띄우는 걸로 결론이 났다고 하더라고.”
자동화 추천 프로그램이 런칭하기 전까지는 기존 서비스에 대한 문제를 이슈화되지 않을 정도로 문제들을 소소히 수정해서 임원인사 시즌을 넘긴다는게 김 상무의 계획인 듯 하다는 게 광민의 생각이었다.
“뭐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시키는대로 하는거지.”
김 상무가 이야기하는 주인의식이란 단어는, 이상하게 윗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더 멀어지는 이야기였다.
“김 상무님 골프 엄청 잘 치신다면서요?”
개발팀장이 진수와 원기에게 미팅 시작 전에 인사를 한다며 던진 말이었다.
“거기까지 올라가신 분이면 골프 정도야 우습게 치시겠죠.”
그걸 또 원기가 받아주었다.
“우리 상무님이 어제 김 상무님이랑 골프 회동 했다면서 자기는 도저히 못 이기겠더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임원들의 골프회동에서 루키의 문제는 뒤에서 조용히 처리하기로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시스템을 다 갈아엎어야 한다고 했던 개발팀장은 갈아엎는 것과 현재 문제를 그대로 두는 것의 그 중간 어디쯤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고객의 개인화된 기록이 모두 남아있어 원칙적으로는 외부 시스템에 오픈을 시키지 않는게 R mall의 시스템 원칙이었지만, 고객들에게 외부 시스템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받고, 동의한 고객의 데이터에 한해 루키의 시스템과 연동시키는 작업을 향후 3개월간 하기로 한 것이다.
“참, 선배님도 한때 그룹사 골프대회 같은데서 상도 받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우수상이였던가?”
“에이 그게 언제적 얘긴데. 요즘은 우리 애가 나보다 골프를 더 잘쳐.”
“아, 맞다, 애가 고등 골프선수라고 했죠? 조만간 딸 덕 좀 보시겠네.”
원기에게 딸이 있었고, 고등학생이며, 골프선수 지망생이라는 정보가 진수에게는 루키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보다 더욱 흥미로웠다.
“운동화 반품”
“지난 9월 22일에 구매하신 나이키 에어맥스 반품하려고 하시나요?”
고객의 동의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 대리와 함께 1주일 내내 야근하며 기획한 문구와 이미지로 앱 푸쉬를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도 열어보지 않는 고객이 절반 이상이고, 열어봤다고 해도 동의를 하는 고객은 5% 내외였다. 팀장은 고객 동의를 10% 이상 높이는 것을 올해 연말까지 해야 한다며 성화였다. 그래야 서비스에 투자한 비용이 의미있어진다는 것이었다. 다행인건 루키가 그 사이 학습이란 것을 해서 동의를 한 고객들에 대한 응대는 제법 똑똑해졌다는 것이었다.
“이거 너무 빨리 안정화되면 안되는데.”
붙어서 함께 일한지 1달쯤 되자 원기는 없던 너스레까지 떨었다.
“왜요, 빨리 끝내고 다른 일 좀 하고 싶은데”
“그럼 또 할 일 없어지잖아요. 그래도 2년은 걸릴거라고 해서 앞으로 2년은 회사에 붙어있겠구나 싶었는데. 애가 재수만 안하면 첫해 등록금은 회사에서 해결해주니깐.”
농담인듯 진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답변을 하지 못하는 버릇이 진수에게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 대학 등록금까지 받으려면 나는 대체 R을 몇 년을 더 다녀야 하는거지. 진수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난 번에 구매하신 책상용 LED스탠드에 대한 후기를 루키에게 들려주세요!"
원기의 바람과는 다르게 개발팀과 함께 작업한지 6개월만에 루키 서비스에 개인정보 활용 동의를 한 10% 내외의 고객들에게 루키는 어느 정도 문제 없이 상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다. 고객이 접속하면 늘 같은 멘트만 했던 초창기와는 다르게, 해당 고객이 지난 번 접속시에 구매한 것이나 검색했던 것에 대해 먼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원기 입장에서 다행이었던 것은, 챗봇 서비스에 대한 향후 유지보수를 원기가 메인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해는 니 덕에 시간도 빨리 간거 같다"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라다고 불평하면서, 실제로는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있죠. 저에게 필요한걸 말씀해주시면 1분 1초라도 더 빠르게 도와드릴게요!"
원기가 광민에게 소개해준 빅데이터 서비스 회사의 '자연어처리'라는 서비스가 루키에 적용되었다. 루키는 이제 구매나 환불, 교환, 결재와 관련없는 말에도 어느 정도 대응을 할 수 있는 서비스가 되었다. 자연어처리 전문 서비스 회사의 대표는 원기와 함께 R그룹에 입사한 동기였는데, 빅데이터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 얼마 전에 회사까지 차렸다고 했다. 밖은 춥다고들 하더니 누군가는 따뜻한 봄이었나 보다.
"우리 팀 올해 너무 고생 많았어요. 루키랑 자동화 추천 프로그램 모두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지주사, 다른 계열사들도 너무 신기해하고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있어."
회식자리에서도 술을 많이 먹지 않는 김 팀장이었지만 오늘은 기분이 정말 좋은 건지, 연말 회식이라 그런건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특히 여기 루키팀, 진짜 너무 고생했어요. 장원기 책임, 김진수 책임, 박기영 대리 특히 개발적인거 푸느라 너무 고생 많았고 이광민 책임, 민영이도 말도 안되는 온갖 케이스들을 처리하느라 고생 많았고."
김 팀장한테서 이렇게 따뜻한 눈길을 받아본게 얼마만이었던가. 임원들과 주간회의를 하고 나올 때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언제쯤 고객 동의율을 10%를 넘기는 거냐고 닦달하던 김 팀장이었는데, 그 모든게 마치 오늘을 위해 그랬던 것인양 모든 팀원들에게 정 책임을 바라보던 그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 팀장님 저 서운해요. 기획은 제가 했잖아요."
"자기는, 이거 말고 더 큰 축하를 받을 거잖아. 여러분 주목. 올해 우리 팀에 진짜 큰 경사가 났어요. 루키랑 자동화 추천 프로그램, 아직 베타 서비스 단계이지만, 이 두가지 서비스에 지주사도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 그래서 우리 팀 대표로 저와 정수연 책임이 지주사에서 주는 핵심인재 특별상을 수상하게 되었어요. 아니 우리가 잘한게 아니고, 여러분이 모두 같이 잘 해준건데 그걸 우리가 대표로 받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같.."
순간 박 대리가 젓가락을 너무 크게 내려놓는 바람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박 대리의 얼굴은 취기인지 분노인지 벌게져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것을 알아챈 박 대리는 어색하게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박수를 쳤다. 박수와 웃음은 전염되는건가. 모두가 박대리를 따라 박수를 쳤고 다시 술잔에 술이 채워졌다.
"그럼 시상식에서 수상은 두 분이 하시지만 수상자 목록에 저희도 다 들어가고 상금도 나눠갖는건가요?"
눈치가 없는건지 혹은 너무 눈치가 있는 것인지, 이 와중에도 민영은 놓치지 않고 본인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재주는 뭐가 부리고 상은 누가 타고. 참나"
오늘만큼은 진수도 광민을 따라 담배를 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 때문인건지, 느끼한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혹은 방금 들은 소식 때문인지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결국 고과도 다 저기서 챙겨가겠네. 아주 트리플S 받겠어."
안에서는 신이 난 김 팀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팀원들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적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가득한 밖이 더욱 고요하고 평안하게 느껴졌다.
"이 책임님, 불 좀.."
언제 나왔는지 원기가 조용히 진수와 광민에게 왔다.
"라이터를 책상에 놓고 온 모양이예요."
평소 본인의 성격처럼 담배에도 조용히 불을 붙이던 원기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루키가 잘 돌아가서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루키는 지금도 일하고 있겠다. 그죠? 하하. 이래서들 AI AI 하나봐. 사람처럼 퇴근을 안해도 되니깐."
그렇지만 평소답지 않게, 원기는 술을 조금 마셨는지 광민과 진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아니, 근데 선배님은 솔직히 짜증 안나세요? 지금 챗봇에 있었던 문제 다 풀어낸건 선배님이랑 우리들인데 상은 엉뚱한 사람이 받고"
"에이. 그래도 저 사람이 기획해서 내가 이렇게 할 일이 생긴건데 뭐."
경험이나 연차는 사람을 여유롭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근본적인 성격과 성향탓일까. 원기는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듯 하였다. 하긴 천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올거라고 누군가가 얘기했다는데, 진수와 광민이 지금 할 일이 있는 것도 새로운 서비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기획자가 팀에 들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진수도 분명히 루키가 기획되고 있는 단계에선 훌륭한 기획자가 팀에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뭐, 옛날 얘기하는거 사람들이 별로 안좋아하니깐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나도 전에 지주사에서 주는 그룹상 받아봤거든요. 당시 백화점 수도권 매출이 S사를 넘은 일이 있었었거든. 근데 그 상 그거..별거 없어. 그냥 그때뿐이지 뭐. 그래도 나때는 포상금 뿐만 아니라 가족여행상품권, 금 1돈 이런것도 줬는데, 지금은 포상금도 많이 줄고 다른 부상은 없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깐 받는 사람 부러워할 것도 없어요."
"아..선배님도 예전에 받으셨었구나."
"에이 아무 것도 아니라니깐. 음..참 그때 받은 상품권으로 간 여행에서 지금 딸애가 생긴거니깐, 별거는 별거인건가?"
진수, 광민, 원기는 순간 눈이 마주쳤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우리끼리 2차나 갈까요?"
"그럼 안에 인사나 하고 나오죠."
"인사는 무슨. 다들 우리가 눈치껏 사라져주길 바랄걸?"
광민이 요즘 애들말로 '팩폭'을 해버렸다. 발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 위 까만 하늘 속으로 하얀 담배연기가 몽글몽글 사라져갔고, 식당에서 풍기던 고기 굽는 냄새도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