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와 조선시대 노예가 다른게 뭔지 알아?"
"조선시대 노예는 본인이 노예인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주인이 집도 주고, 밥도 주고 했는데,
현대판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인지도 모르는채 일을 하고, 주인이 월급 주는 걸로 집도 사고 밥도 사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거야."
남자친구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머릿속을 울리는 월요일 출근길. 서울의 지하철은 현대판 노예들로 가득했다. 윤진은 '앞차와의 안전거리 확보를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며, 오늘 주간 보고에는 무슨 항목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며 주인이 계시는지 안계시는지도 모르는 건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윤진의 인사에 오늘도 먼저 나와있던 옆자리의 박책임은 무표정한 얼굴을 돌려 느릿하게 얼굴만 까딱하고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윤진도 그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고 PC를 켜고, 화장실에서 매무새를 만지고, 아침커피를 홀짝였다. 그새 사내 아나운서의 거짓된 희망찬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아무리 바빠도 사내방송은 봐야한다고, 장 실장이 이야기한터라 몸까지 돌려 어떤 팀이 서울의 어느 동네 독거어르신들에게 김장김치를 해서 나눠드렸다느니, 회사에서 메신저 이모티콘을 만들었다느니 하는 궁금하지도 않은 뉴스를 시청했다.
뉴스가 끝나고 나니 영업1팀에서 온 실적 취합 파일, 마케팅 3팀에서 온 가격전략 메일, 옆 팀 김 책임의 주간업무보고 취합 독촉 메일까지 메일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여기에 1주일 뒤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한 본부장 보고가 있어 PPT 보고서까지 만들어야 했다. 그 보고가 끝나면 CEO 보고까지. 보고서를 만드느라 진짜 해야할 업무를 못하는 일이 허다한 것 같았다. 화장실 문마다 "우리가 보고하고 있을때 경쟁자는 이미 앞서나가고 있다"는 계몽 문구가 붙어있었는데, 그 누군가들은 계몽되어있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월요일부터 윤진의 키보드는 10초도 쉬지 않고 타닥타닥 난타를 당하고 있었다. 윤진의 키보드가 너무 시끄러워서인 것인지 몰라도, 상대적으로 옆자리 박 책임의 키보드는 조용하게 느껴졌다. 가끔 마우스만 딸깍딸각 소리를 낼뿐이었다. 아무리 바쁜 와중이라도 본인도 모르게 눈길이 옆으로 향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본 박 책임의 모니터에는 오전에는 홍보팀에서 스크랩해주는 신문기사가, 오후에는 포털의 주요뉴스가 떠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박 책임님은 업무가 뭐예요?"
직장인의 오아시스라는 점심시간, 윤진은 참지 못하고 앞자리 강 책임에게 물었다.
"모르세요? 그 분 케냐 주재원이었잖아요"
"아, 그거 말고 현재 이 팀에서의 업무가 뭔가 싶어서요. 그래도 내가 여기 온지 3개월째인데 정확하게 어떤 업무이신지 잘 모르겠어서요."
"전에는 팀 예산 짜고, 주간업무보고 취합해서 넘기고, 그런 공통업무였어요."
"근데 지금은 왜?"
"주간업무 보고시간에 우리 팀 파일을 날리셨거든요"
"아..."
"예산도 0하나 잘못 써서 난리난 적도 있었고요. 전에 품의 올리다가는 또..."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통은 그 사람을 대체할 사람이 오는게 아니라 그 사람 일을 주변에서 안게 된다. 그렇게 그의 일은 팀원 한명 한명에게 하나 하나씩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 사이 박 책임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되었다.
"10년 뒤 내 모습이 아니길 바랄 뿐이죠." 강 책임이 덧붙였다.
바쁜 월요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던 오후 4시, "오늘 회식은 필참 바랍니다"란 제목의 실장 메일이 날아왔다. 사내에서 정치라곤 눈꼽만큼도 못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장 실장이 인사철을 얼마 남기지 않고 영업을 뛰는 부서와 잘 지내야 한다며 영업쪽 담당 상무 조직과 1주일 전에 잡은 회식이었다.
보고에 보고가 켜켜이 남아있는 이 시기에, 그것도 월요일부터 회식이라니. 짜증나지만 아랫것들은 스케쥴도 위에서 시키는대로 움직여야했다. 먼저 회식 장소에 도착한 사람들이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며 장 실장과 상무, 팀장들의 좌석에서 먼 곳부터 자리를 잡았다. 윤진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실장의 눈에 가장 띄지 않을 자리에 착석했다.
고기가 익고, 술이 도니 또 임원들이 자리를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바람을 잡았다. 근데 박 책임이 뭔 일인지 윤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이 풀리고 입꼬리가 올라간게 술에 반쯤은 취한듯 했다.
"그 주간보고때 김 책임이 발표한 내용 있잖아."
"네?"
"그 경쟁사랑 영업 마진율 계산한거"
"네"
"그거 재무팀에도 확인해봤어?"
"기획팀이랑은 확인했죠"
"아니지, 회계를 보는 재무팀이랑 확인해야지"
"네? 재무가 그런거에 관여를 하지 않는데 그걸 왜 재무랑..?"
"아니, 내 철학이 있는데,, "
"아, 형님 여기 계셨네~"
영업팀의 백 책임이 와서 박 책임의 말을 끊어주지 않았으면, 윤진은 때도 아닌 박 책임의 철학을 듣게 될 뻔했다. 이 순간만큼은 백 책임이 윤진의 은인이었다.
"어, 준성이!"
"김 책임, 박 책임님이 케냐에서 나를 얼마나 살려줬는지 내가 얘기했던가요?"
"백 책임님도 케냐에 계셨어요?"
"너가 나랑 한 6개월 있었나?"
얘기인 즉슨, 박 책임과 백 책임은 5년 전 케냐 오피스에서 6개월 정도 같이 일한 사이다. 박 책임은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백 책임은 그 어렵다는 아프리카 시장에서 영업왕으로 전성기를 이끌었다.
"박 책임님이 케냐에서 Shah를 소개해주셔서"
"그 사람이 우리 애들 선생의 조카였거든"
"맞아 맞아 그랬지. 아무튼 그래서 케냐에서 거래선 물꼬가 하나 하나 풀린거예요. 케냐에서 거래를 하려면 거기 현지에 사는 인도 3세대들이랑 관계를 잘 맺는게 중요한데..'
"우리 애들 엄마가 워낙 사람 만나는걸 좋아해서 그쪽 부류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울리게 된게 인연이 된거지"
"아무튼, 형님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온거 아닙니까"
같은 '책임'이라고 해도 백 책임은 본사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 중남미까지 그가 맡은 지역의 세일즈 실적은 늘 우상향 곡선을 찍었다. 오죽하면 차기 팀장은 물론, 담당 상무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사내에 자자했다.
그런 사람이 박 책임에 대해 저런 평가를 내려준다니, 그게 그의 진심인지 아니면 입에 발린 소리인지는 몰랐으나 윤진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게 된 회식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