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만삭의 시절이여

by Grace Hanne Lee

연차를 냈다. 모처럼 나무도 어린이집에 연차(?)를 내고 둘이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대단한 계획은 아니지만 약간 떨렸다. 나무와 단 둘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거의 2개월 만이라 기대와 설렘도 있었고, 그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나와 같이 지내는 게 어색해졌거나 시시해졌으면 어쩌나 걱정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일단 외부 일정을 잡았다. 휴직 시절 자주 만나던, 애기 엄마들이 된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남편의 재택, 청소 이모님 오시는 날, 시댁 가는 날, 문화센터 가는 날 등등. 회사원인 나보다 더 일정이 가득했다. 그래 나도 생각해보면 집에서 지낸다고 일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 독박 육아들로 힘들 친구 엄마들에게 나의 연차가 반가운 소식일 줄만 알았는데. 꼴랑 두 달 안 했다고 육아맘의 일상에 대한 감을 잃었나 보다. 회사원보다 바쁘면 더 바쁘다.


나무와 둘이서 공원 나가 놀아야지 생각하다 문득 예정일이 가까워 출산휴가에 들어간 친구가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연락해보니 마침 일정이 없단다. 역아로 다음 주에 수술 날짜를 아예 잡아둔 상태라 하루하루 한가하게 보내고 있던 차에 나의 소식이 반가웠단다. 기쁜 마음으로 한 시간 좀 안 되는 거리를 나무 낮잠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아이가 없는 집에 나무를 데리고 간 게 참 오랜만이었다. 나무 장난감이라도 몇 개 챙겼어야 하는데, 정말 깔끔하고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예쁜 신축의, 이사 한 달 차 집에 놀러 가려니 나무가 뭐라도 깨트릴까 걱정이었다. 우리 집은 티비를 없앤 탓에 걱정 한번 없었지만, 거실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는 티비에 혹여라도 흠집라도 낼까 조마조마했다. 매의 눈으로 나무를 보면서도 집안 곳곳의 신혼의 느낌과 아이 없는 집의 정갈한 모습에 새삼 부러웠다. 나의 임신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첫째 임신이라 따로 돌보아야 하는 아이 없이 오직 나만 있던 시절. 막달에 다가와 생애 처음으로 공식적인 휴식기를 선언(?)하고 집안에서 생활하던 시절. 그때 처음으로 집을 집답게 느껴봤던 것 같다. 늘 잠만 자던 공간이 아니라, 내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자, 베이킹이나 드로잉 등의 내 취미가 배어있는 공간. 내 삶이 고스란히 표현되는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내 삶의 반영체로서 존재한다.(=키즈카페)


친구와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만삭의 내 마음도 떠오른다. 이미 열 달 뱃속에 품고 있어서 아이가 너무너무 궁금하고 너무너무 기대되면서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출산 자체의 공포가 공존하던 시기. 친구는 아예 날짜를 받아 논 상태라 느낌이 다르지만, 예정일이 가까워 오도록 언제 나오나, 양수가 터지는 느낌은 어떤 것이려나- 아이의 신호를 마냥 기다리던 시절. 그때의 설렘과 떨림을 떠올리며 점심을 먹고 있는 나무를 보니 기적같이 신기하다. 고작 일 년 남짓 자랐을 뿐인데, 내 몸 안에서 나와 신체를 공유하며 한 몸으로 지내던 아이가, 건강히 나로부터 분리되어 신체적으로도, 그리고 이제 정신적으로도 서서히 독립되어가는 과정이 새삼 빠르게 느껴졌다.


둘째를 준비하는 지금, 만삭의 친구와의 만남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만삭 시절은 이제 다시는 겪지 못할 시간이라는 것과, 나무가 더욱 기적 같고 신비한 존재이며 참 소중하다고 새삼 느끼는 것,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안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괜히 설레기도 한다.

이전 24화우리를 위해 나를 지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