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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영 Grace H Jung Jul 04. 2023

화가의 양구일기 12_살아있는 장소가 되었다

양구 사명산 '자작나무' 수채화, 안대리 '논일' 스케치

2016년 4월 11-14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20-23일 차.


<안대리 뒷산 길> 종이에 먹, 27.9 x 35.6cm, 2016


어제의 자작나무숲 드로잉을 수채화로 그려보려 같은 곳에 갔다. 3시간이나 그렸지만 완성하지 못하였다. 내일을 기약하고 내려오다 아쉬워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 아래에선 산 너머의 다른 자작나무 숲이 보인다. 두 그룹의 자작나무숲. 아, 이것인가. 각각의 자작나무숲 아래 부대와 밭이 있다.


내가 스튜디오 작업 후에 4시쯤 가서 일하시는 분을 못 만나 그렇지 밭에는 비료포대가 듬성듬성 놓여있는 것이 밭을 갈고 계시는 거다. 내일은 조금 일찍 나가봐야겠다.


_2016/04/11 드로잉 노트: 자작나무. 안대리 뒷산




<안대리 논 고르기> 종이에 먹, 각 27.9 x 35.6cm, 2016


자작나무숲 수채화를 완성하러 가는 길에 내가 그리는 바로 그 밭과 논 주인 임종률 선생님을 만났다. 트랙터로 논을 ‘공굴고’ 계셨는데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땅을 수평으로 하기 전 대강 평평히 고르는 작업이라 하셨다. 무거운 수채화 도구를 낑낑거리며 들고 이 산자락 끝까지 왔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논 공굴기 작업을 크로키하였다.


육중한 트랙터가 논을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방향을 바꾸고 삽을 들었다 놓았다 털었다 하여 그려 넣기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흡족한 것 한 장 못 건지고 두 시간이 지나버렸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간 마을 곳곳에서 미동도 않고 오랜 시간 그림 그리는 날 보셨다던 논 주인은 어설픈 크로키에도 역시 보통이 아니라며 감탄하셨으나 다음에 더 잘 그려드리겠다 말하는 수밖에. 돌아와 채색을 더하며 수고가 헛되지 않게 노력하였다.

 

_2016/04/13 드로잉 노트: 안대리  고르기




<안대리 뒷산 사명산 자락> 종이에 먹, 27.9 x 35.6cm, 2016


부대와 마을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공존.

두 그룹의 자작나무처럼 섞이지는 않으나 같은 아름다움으로.

자작나무 두 그룹이 산을 사이에 두고 같은 하양으로 빛난다.

산과 산이 엇갈려 맞물림.


_2016/04/14 드로잉 노트: 안대리 뒷산 사명산 자락




<자작나무, 안대리 뒷산 4월> 종이에 수채, 28 x 39.5cm, 2016, 개인소장


수채화가 3일 9시간 만에 완성이 되었다. 만족한다.


살아있는
장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산자락. 이름 없이 그저 사명산 끝자락 어디였을 이곳은 내 그림 안에 담기면서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나며 살아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회화로 거듭나면 이곳은 차원이 다른 깊이로 남게 되겠지.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해석의 작업으로 나오게 될까. 오래 걸리게 될 그 시간 동안 순수하게 눈과 손에 반응해 몰입했던 이 작업에서의 생각과 느낌이 지속하기를.


_2016/04/14 수채화 노트: 자작나무 안대리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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