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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영 Grace H Jung Jul 08. 2023

화가의 양구일기 13_때가 되면 흘러나오겠지

양구 DMZ 두타연 '단장의 능선', 안대리 '마을사람들' 드로잉

2016년 4월 15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24일 차.


<단장의 능선> 화첩에 먹 드로잉, 31.5 x 137.5cm, 2016


동양화첩을 처음 사용하여 그려보았다. 긴 능선을 그려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지만 비싼 화첩을 망칠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가난한 화가의 마음이다. 6시간을 쉬지 않고 그려 대강을 완성하였다. 얼마큼 길어질지 몰라 화첩의 한 중앙에서 시작하였더니 양쪽이 같은 길이로 남아버렸다.


처음엔 조심스러워 주저주저함이 보였으나, 민통선 지역인 탓에 점점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 끝을 내야 한다는 긴박함과 그려가는 동안 얻은 숙달됨이 자유롭고 과감한 필치를 만들어내었다. 눈은 보고, 그 즉시 머리는 생각을, 가슴은 벅찬 감동을 품는다. 그리고 손은 그것을 그려내니, 쉽지 않은 과정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눈은 보고
머리는 생각을, 가슴은 감동을
손은 그려낸다



초반엔 이 과정의 결국이 잘 나와줄 것인가 의구심에 포기할 위기가 온다. 눈에서 손까지의 과정은 짧으나 생각과 감정을 다 쏟아내기까지의 시간은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여정이니, 갈등 중에 묵묵히 버텨야 하는 시간은 심히 위태롭다. 이게 아닌데 싶다가 이렇게 했어야 했나 싶고. 그러나 시간시간이 쌓이면 점점 나아갈 길이 보이고 그림을 통해 더욱 확실히 내 생각과 감정의 추상체가 구체적인 확증을 받으며 이제는 끝까지 가야 하는 열심만이 남는다.


<단장의 능선> 세부


두타연으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위령비 앞에서 자리 잡고 앉아 그리니 관광객이 많이 올까 걱정하였는데 종일 아무도 없어 충분히 집중하고 투쟁의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 후반에 크고 작은 4개의 무리가 지났는데 일반인의 시선에 미완의 그림이, 과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주지만 동시에 내 그림이 얼마만큼 대중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몇몇과는 대화도 나눴는데 그림을 좋아할 뿐 아니라 그리고자 하는 의도도 좋아해 주어 적잖은 휴식이 되었다. 두타연 출입이 통제되는 시간까지 완성을 하고 마지막으로 나왔다. 좋은 작업으로 새롭게 재탄생되는 그날이 어서 오면 좋겠다.

 

_2016/04/15 드로잉 노트: 단장의 능선 고지




<김정자 할머니와 김중배 할아버지> 종이에 먹, 각 25 x 23cm, 2016


농촌의 일상을 그리며 식물도, 농작물도 알아가는 것이 좋다. 아직은 사람 그리는 것이 익숙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다. 마을 분들과 소소한 대화도 나누며 알아가니 어서 경지에 올라 더 잘 그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_2016/04/15 드로잉 노트: 안대리 김중배 할아버지 지난해 마른 국화대 잘라내기, 김정자 할머니 두릅 따기




<임병욱 할아버지와 오골계> 종이에 먹, 각 25 x 23cm, 2016


오골계를 키우시는 할아버지. 50년 전엔 군대에서 제대로 먹을 것이 없어 닭이며 장독, 쌀독 다 훔쳐갔단다. 지금은 대민봉사도 나와주고 좋아졌다 하신다. 당시엔 뒷산도 다 헤집어 아무것도 없었다며. 내가 그린 아름다운 자작나무가 있는 그 뒷산이 그런 과거를 지닌 숲인 줄은 몰랐다.


김중배 할아버지는 박수근의 그림이 손녀딸 그림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왜 그리 비싼 거냐 물어보셨는데..


이렇게 부족한 솜씨에 안타까워하면서도 마을 풍경을, 마을 사람들을 그리는 게 좋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잔잔한 감동으로 온다. 난 사람의 무엇을 그리고 싶은 걸까.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 걸까. 이렇게 무작정 그리고 있으면 후에 알게 될까.


_2016/04/15 드로잉 노트: 안대리 임병욱 할아버지, 오골계




단장의 능선에서 스쳐가는 만남이지만 많은 무리를 만났다. 종일 홀로 그릴 수 있어서 좋았었고 마지막에 스친 사람들과의 교류도 좋았다. 마을 사생에선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작가는, 그림은
 정직할 때 힘이 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담아내는데 집중하고 있고 그것조차 잘 되지 않을 때는 의기소침해진다. 여기서 어떻게 발전해 가게 될까. 주께서 주시는 영감을 앞서 가지 않으려 한다. 내 안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주신 생각, 감정, 느낌,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쌓여 어느 때가 되면 흘러나오겠지. 모든 인생이 그러하겠지만 작가는, 그림은 정직할 때 힘이 있다. 


기술이 마음을 앞서지 않고 생각이 실력을 위장하지 않을 때. 


나는 그런 정직한 힘, 탄탄한 토대를 갖춘 화가이고 싶다.


_2016/04/16 아침묵상(출 1:7) 중에: 정직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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