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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영 Grace H Jung Jul 11. 2023

화가의 양구일기 15_판단을 넘어서는 깊이를 갖는다

양구 안대리 '마을', '부대' 스케치. 작업실 '땅굴' 콜라주

2016년 4월 18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27일 차.


<안대리, 부대> 종이에 먹, 25 x 23cm, 2016


사단본부가 보이는 안대리 마을 풍경을 담았다. 자작나무숲과 부대, 마을을 동시에 담는 가능성을 고심 중이라 일단 부대가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서 그려보았다. 태극기가 나무에 가려버려서 후에 다시 한번 그려야겠다. 때마침 군용 헬기가 날아가고 두릅을 따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보여 급히 그려 넣었는데 헬기는 정확한 형태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터무니없이 작아졌다.


시골 풍경을 넓게 담아내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특출난 형태의 주제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개체들을, 모두가 그만의 독특함을 갖되 하나의 그림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정성을 들인 시간은 반드시 좋은 결과물을 낸다. 


물론 좋은 작업이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쌓인 시간이 담긴 그림은 좋다, 안 좋다의 판단을 넘어서는 깊이를 갖는다.


시간이 담긴
그림


그리다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며 바람이 세다.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그리는데 바람에 우산이 날아가 저 밑 개울에 빠져버렸다. 오골계를 키우시는 임병욱 할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인사를 드리다 그리된 거라 여기셨는지 슬리퍼 채로 바위를 타고 내려가시다 미끄러지셨다. 급히 잡아드리며 '다치신다 그저 두시라, 괜찮다' 하였는데 개울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 우산을 건져 올려주시고 걱정하는 내게 손을 휘저으시며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신다.


좀 더 그려야 했겠는데 아무래도 동네에 민폐가 되지 싶어 도구를 챙겨 내려왔다. 할아버지께서 다치거나 감기 걸리시면 안 되는데.. 내일 무어 주전부리라도 사가야겠다.


_2016/04/18 드로잉노트: 안대리 부대 사단사령부(사단본부)




'땅굴' 100호 먹 드로잉 콜라주 작업과정 _2016/04/18


한 주가 시작한다. 이번 주는 이틀만이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한창 잘 진행되는 중에 잠시 멈춘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불안함을 준다. 그러나 양구로 이주해 온 이후 한 달간의 강행군에 몸과 마음은 휴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모든 상황과 사람을 주관하시니 나의 조급함이 이에 온전히 기댈 기회이리라. 귀한 작업의 날이 되기를. 작업을 통한 나의 부르짖음이 오늘 주께 닿기를. 

 

_2016/04/18 아침묵상( 2:24-25) 중에: 부르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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