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대리 더 안쪽으로 이동하였다. 언덕 위로 보이는 나무가 높다랗게 열을 지어있는데 가지는 수평으로 뻗어 아래로 쳐지는 것이 참으로 묘한 모양이라 그리고 싶었다.
사다리를 타고 나무 사이에서 일하고 계신 아주머니들과 사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사과나무 한마디 길이가 위로 길어질수록 사과가 달릴 가지 서넛이 느니 높다랗게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미국에서 사과 따며 탔던 키 작은 사과나무들과 사뭇 다른 생김인 것이 이해가 갔다. 또한, 사과알이 큼직하고 묵직하여 가지들이 부러지게 되니 자라날 때 약간 밑으로 잡아주면 자연스레 쳐져 자라며 사과알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라고.
고급의 상품이 대중에게 향유되는
그리다가 함께 쉬는 시간. 크고 맛난 사과를 얻어먹으며 사과밭 사이에서 휴식도 잠시 취하였다. 아주머니들이 하고 계셨던 일은 사과꽃을 따는 작업이었는데 사과가 열리는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한 알의 크고 튼실한 사과를 위한 수고가 참으로 정성이 가득하였다.
사장님께서 미국은 가난한 사람도 모두 먹을 수 있도록 이렇게 상등품으로 가는 재배를 포기하였다니, 여기에서도 미술에서처럼 귀한 고급의 가치와 많은 사람의 향유의 가치가 결국은 선택해야 할 양립의 관계인가 싶었다. 고급의 상품이 대중에게 향유되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한계가 극복되길.
<사과농장 헬멧 쓴 허수아비> 드로잉 작업과정 _2016/05/01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헬멧 쓴 허수아비는 참으로 진짜 사람 같아서, 더구나 사과나무와 한 가지로 팔을 벌려 높다랗게 서있으니 그 어울림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에 새로운 곳 탐험을 하다 그리게 되었던 것이라 더 무리할 수가 없어 6시에 부대의 애국가 소리와 함께 미완의 2장을 접고 와야만 했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모르는 세상과 삶의 부분들을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 이 즐거움의 기록인 드로잉들은 어떤 작업으로 새로이 태어날까.
_2016/05/01 드로잉노트: 조주암사장님사과농장꽃따기
<사과농장 꽃 따기> 종이에 잉크와 먹, 25 x 23cm, 2016
잉크로만 그렸던 것이 안타까워 나머지만이라도 먹으로 그리려고 새로 구입한 붓펜, 먹물을 담은 수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불량이었던가 큰 먹 방울이 그림에 떨어져 버렸다. 일주일 만에 사생을 나온 탓인지 주저함이 많았었는데 그림의 위로 툭 떨어져 버린 먹 방울로 긴장감과 속도감이 선에 회복되었다. 그 뒤로도 조심하여 주시하며 그렸음에도 예기치 않은 큰 먹 점들이 더 생겼는데 오히려 이것이 그림임을, 바람 부는 야외에서 그렸음을 알리는 흔적 같아 보기 좋다. 또한 이 검은 강도에 맞추려 선에도 강함이 더 올라갔다. 하루의 사생이 손을 많이 풀어주었는지 먹선이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사과꽃을 따는 아주머니 두 분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있다. 아주머니들은 그림에 방해될까 빨리 따고 오히려 꽃을 남겨두고 멀리 가버리셨는데 얼굴을 다 가린 커다란 모자에 이것이 무언가 싶다. 그래도 이제는 이렇게 사람이 어우러져 들어가는 풍경이, 자연의 아름다운 구성의 미와 함께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들어가 있는 풍경이 내게 큰 즐거움을 준다.
이야깃거리 있는 풍경
이것이 구상의 힘일 것이다. 이야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실마리. 나의 이야기와 합일점을 찾기 쉽게 하는.
추상이 선과 점과 색과 힘과 모든 절대미의 가치들로 아름다움을 만든다면, 구상은 그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가까이 다가가 소유케 하는 끌림을 더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드로잉들은 구상의 힘 안에 이 모든 것이 담겨있는데 추상화 과정을 거친 이후에 추상의 힘과 구상의 힘이 어떻게 적절히 하나 되어 그림을 이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