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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영 Grace H Jung Oct 30. 2023

화가의 양구일기 29_이를 어쩔까

양구 박수근미술관 '잔디 깎기' 드로잉

2016년 5월 27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66일 차.  


<미술관 잔디 깎기 점심> 종이에 먹과 수채, 25 x 23cm, 2016


미술관 잔디를 깎던 아저씨들이 점심 식사를 하러 작업실 바로 앞 박수근의 작품이 프린트되어 있는 벽 앞의 데크 그늘에 모이셨다. 시원한 사과주스 좀 드시라고 갖다 드리는데 박수근 그림과 이분들의 조화가 참으로 재미있다. 여성과 남성. 근대와 현대. 무채색의 연속과 강한 색채의 짜깁기. 일과 휴식. 


그림만의 논리



나무 데크에 청록색 커다란 플라스틱 비닐을 펼쳐 자리를 깔고 점심을 드셨다. 더운 날이지만 날리는 잔디와 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덧입은 긴 팔에 조끼, 토시, 거기에 수건과 모자. 겹겹이 겹친 옷가지들의 색깔이 참으로 마구잡이이다. 먼지를 뒤집어써 칙칙한 중에 튀는 저 색채의 부조화를 얹고 싶었다. 그런데 그 부조화의 느낌이 그림이 멋져 보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다니. 이를 어쩔까. 실제에서는 난 이 기묘함에 감탄했으나, 그림에서는 그림만의 논리가 우선인 걸까.


_2016/05/27 드로잉노트미술관 잔디 깎기 점심




<미술관 잔디 깎기> 종이에 먹, 25 x 23cm, 2016


점심식사 후 다시 잔디를 깎기 시작하셨다.


겹겹이 걸친 옷들 위로 모자 채 뒤집어 덮어쓸 수 있는 커다란 검은 양파망을 쓰고, 거의 전신을 가리는 튼튼한 비닐 앞치마에 장갑으로 단단히 무장한 아저씨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예초기를 돌리시는 것이 외계를 탐사하는 모습 같고 신기했다.


_2016/05/27 드로잉노트미술관 잔디 깎기

 



<잔디 깎기 휴식> 종이에 먹, 25 x 23cm, 2016


미술관 행정팀의 철호 씨가 커피와 치킨을 시켜주어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데 작업실을 지나치며 같이 먹자 부르신다. 사생 드로잉을 나가면 매번 함께 새참 먹기를 원하시니 먹다가 정작 그리지 못하였는데 이번엔 드로잉을 먼저 하겠다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담아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린 데다 두 번째 같은 분들을 그려서인지 군상으로도 어울리게 담겼는데 한 명 한 명 닮기까지 하니 무척이나 뿌듯하였다. 드로잉을 훔쳐가고 싶다고까지 하니 썩 모델들의 맘에도 든 모양이다. 이봉주 씨의 아들이 와서 남은 치킨을 받아가는데 그림 중에 아버지를 꼭 집어내어 닮은 것이 증명도 되었다.


감자꽃 하얗게 피어있는 지금 김매는 것을 그리면 멋있겠다 하시니 농촌 사람의 눈에도 멋져 보이는 장면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어 내일 사생은 감자밭으로 가보아야겠다. 


_2016/05/27 드로잉노트잔디 깎기 휴식 치킨김명재김종만이봉주민춘복박종남




새로운 땅에 이주하고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 정착해 나가지만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는 말자. 나는 주를 그리고자 하는, 주의 세상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을지라도, 그 안 깊숙이 담긴 주의 사랑을 그 핵심에 담아낼 것이다. 주의 영감으로 채우소서. 변치 않는 진리와 이상으로 날 감동시키소서. 

 

_2016/05/27 아침묵상( 18:30) 중에 땅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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