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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16. 2020

나는 무엇을 잃었는가?
(사별 후 3)

 상실을 똑바로 쳐다보기

 

간혹 물건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난 이렇게 말하곤 한다.

, 어차피 버리려고 했었어. 너무 낡았어. 이젠 좀 지겨웠어. 질릴 때도 됐지

스스로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가치를 낮추어 생각하고 말함으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덜어 내고 더 이상 그 물건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 상실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 나는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던 물건 하나를 잃어버릴 때 취하던 행동처럼 남편의 죽음을 별거 아닌 일로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동시에 죽는 부부는 거의 없어. 남편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언젠가 먼저 죽었을 거고 그러니 언젠가 겪었을 일이지. 22년 같이 살았으면 오래 살았어. 이젠 질릴 때도 되었지. 그러니 호들갑 떨지 마


한동안 나는 내 삶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생각하거나 그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 그의 부재와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나는 남편의 죽음과 부재를 인정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 나는 내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억을 상실한 뒤 천만 원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행동은 자신의 상실을 진짜 인정했다기보다는 상실을 축소시킴으로 그 고통을 줄이고 싶은 자기 보호에 가까울 것이고, 자신의 상실을 바로 대면했다고 보긴 어려울 수도 있다. 상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상실한 것의 가치를 축소시키지 않고 그대로 이해함으로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만 진짜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상실의 치유가 자신의 상실을 똑바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나는 남편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기억의 빗장을 풀고 그의 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그가 내게 누구였는지 자문했다.


스스로 닫아버린 기억의 문을 여니 24년 그와의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 흐르고 내 눈물도 흘렀다. 나는 내게 묻기 시작했다.

그는 내 인생의 어떤 존재였는가? 그가 죽음으로 나는 무엇을 잃은 것인가?”


그는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사랑이었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부부가 되겠다고 서약한 순간부터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가 맘껏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되었고, 어떤 부끄럼도 없이 나를 사랑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내 남자였다. 그를 잃음으로 나는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한 남자에게 무한히 사랑받는 특권을 상실했다.     


그는 나의 보호자였다. 

두 사람의 혼인 증명서가 발급되는 순간 그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고, 그와 사는 동안 몸이 아플 때면 의사도 아닌 그에게 먼저 호소했고 차에 이상이 느껴지면 정비공도 아닌 그에게 먼저 알렸으며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모든 서류의 보호자란에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당당히 기재했다. 그가 죽은 후 주민등록등본의 세대 주란에 내 이름이 인쇄되었고 나는 아이들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다. 건강검진 서류의 보호자란을 보았을 때 나는 누구의 이름을 적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를 잃기 전에는 보호자란에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적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든든한 일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를 잃음으로 나는 든든한 보호자를 상실했다.     


그는 나의 동지였다.

결혼 후 우리는 둘이 결합된 하나가 되었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22년 동안 모든 희로애락을 동일하게 나누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한 가정의 부부이고 부모였던 우리는 같이 산을 넘고 광야를 지났으며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한 사람이 웃으면 같이 기뻐했고, 한 사람이 넘어지면 같이 앉아 기다렸다 손을 잡아 일으켜야 했다. 그렇게 22년을 부부로 살아보니 뜨겁던 사랑의 열기는 점차 식어갔지만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서로의 흰머리와 주름살에 마음이 애잔하고 사소하게 서로를 돌보는 동지가 되었다. 예측불허 인생길을 오랜 동지 없이 홀로 걷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는데 나는 지금 혼자가 되었다. 그를 잃음으로 나는 평생의 동지를 잃었고 홀로 광야를 건너고 있다.       


그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부모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섞인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기 시작했고, 아이가 아프면 같이 아팠고 아이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그 아이로 인해 같이 행복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향해 같은 소망을 품고 함께 기도했으며 사랑했고 헌신했다. 언젠가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나갈 때 우리는 나란히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뒤돌아 서로의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그가 죽음으로 나는 혼자 아이들의 결혼식을 지킬 것이며, 혼자서 손을 흔들어주고 뒤돌아 쓸쓸해지는 마음도 혼자 달래게 될 것이다. 나는 혼자 할머니가 되는 기쁨의 눈물을 닦을 것이다. 나는 분명 내 손주들의 좋은 할아버지가 되었을 그를 잃었다.          


그는 나의 지지자였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꿈을 꾸고 무언가를 시도하길 좋아했다.

어설픈 수많은 나의 시작에 그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지만 지켜봐 주었고 격려했다. 어쩌다 운 좋게 내가 상을 받을 때면 그는 기꺼이 아내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어 친구들에게 밥을 샀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의 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늘 자랑스러워했어요. 당신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를 잃음으로 나는 어설픈 아내를 자랑으로 여겨주던 남편을 잃었다.     


그는 나의 코미디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는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유머와 위트가 풍부했고,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웃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의 유머에 “에이, 정말!” 하며 야유를 보낼 때도 많았지만 그는 가장 웃긴 아빠였고 남편이었다. 그가 죽고 나와 아이들은  평생의 코미디언을 잃었다. 그의 장례식을 치른 뒤 나는 3권의 유머 책을 샀고 가족 톡방에 하루에 한편씩 책에 있는 유머를 올렸다. 하지만 어떤 유머로도 그의 주던 웃음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나를 웃기던 그의 몸짓과 언어들이 그립다. 내 기억 깊은 언저리에 새겨진 나를 웃기던 그의 우스운 몸짓들이 이젠 나를 울린다.     


그는 나의 오빠였고 아버지였다. 

10살 때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엄한 분이셔서 나는 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려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의 아내로 살면서 난 아이처럼 울기도 하고 업어 달라 조르고 엿을 사 달라고 졸랐다. 때론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유치해졌고 어리광을 부렸다. 난 남편 앞에서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었고 그는 딸을 둘 키운다고 말했다. 그가 죽음으로 나는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대상을 잃었다.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인데 인생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은 너무도 크다. 한 남자가 죽음으로 내가 상실한 것은  낡아서 쓸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지겨워진 것도 아니고 버리고 싶었던 것도 아니며 대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상실은 크기를 측정할 수 없고 회복되지 못하며 상실된 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울고, 억울함과 막막한 고통 속에 울어도 된다.

나는 눈물을 감출 이유가 없다. 나의 울음은 정당하고 나의 비통은 당연한 것이다.      

“그가 죽음으로 나는 무엇을 상실했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를 다시 꼼꼼히 기억해 낸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그의 의미를 다시 이해함으로  나의 상실을 축소시키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본다.

나는 그를 잃어버린 것을 인정하는 이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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