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 태어난 일을 축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집 밖은 위험하다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과 언니와 오빠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랐다. 십 대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그 생각은 더욱 굳건해진 것 같다. 오이디푸스 왕의 첫 장에 나오는 이야기.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만일 태어났다면 출생한 곳으로 곧 돌아가는 것이 그다음으로 좋은 것이다'라는 구절에 신선하면서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태어나 사는 일이 왜 축복인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무조건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고 강요받듯 배워온 내게 오이디푸스 왕의 저 구절은 희로애락이 범벅이 된 인생의 진짜 비밀을 누군가 알려준 느낌이었다. 세상이 부모님이 선생님이 그간 뭔가 숨겨왔던 진실의 문에 한 발짝 다가간 것 같은!
솔직히 말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날을 기념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일도 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비밀을 감추고 포장하기 위한 의식은 아닐까?
하지만 그 비밀을 엿봤다고 이왕 태어났는데 호시탐탐 언제 어떻게 출생한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만 탐구하기에는 파도처럼 눈앞에 밀려오는 인생의 과업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없었다고 해두자. (사실은 산만해서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어렵다...ㅠ)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아버지는 가끔씩 당신의 생일 파티를 집에서 성대하게 열곤 했다. 보통 아버지 친구 부부가 초대되기 때문에 최소한 16명은 되었고 요리사까지 등장해 음식을 준비하고 방에 큰 상을 놓고 음식을 날랐다. 일손이 모자라 우리 형제들도 동원되었다. 음식 준비에 술이 곁들여진 파티로 아침부터 밤까지 집 안이 들썩거렸고 그날은 우리들은 물론 밖에 있는 강아지들도 푸짐하고 맛난 음식을 먹느라다들 생일이 따로 없었다.
엄마 생신에는 밖에서 가족끼리 외식을 했고 네 명의 형제들도 생일날에 각자의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곤 했다. 특히 나는 반강제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내 생일은 더 신경을 써 주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 두 명도 아니고 네 명의 자식들이 돌아가며 생파를 했으니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생일이든 생일이 끝나면 커튼이 찢겨있고 계단 여기저기가 찍혀있었으며 음식 부스러기가 온천지에서 발견되었다. 초등학생 들인 만큼 방방마다 뛰고 먹는 팀, 마당에 나가 뛰어노는 팀, 흩어졌다 붙었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이후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결혼 전까지는 가족끼리 외식을 하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소박하고 조용한 생일파티를 했다. 결혼 후엔 친구들과의 생파는 거의 사라지고 가족들과만 지냈다. (아이들 생일파티에 열을 내느라...)
그러다 아이들 유치원 때 눈이 맞은 엄마들끼리 돌아가며 생일파티를 열었다. 한 집에 코흘리개 유치원생들 두명씩 케어하고 키우는 일은 극한 직업이라는 것에 동감하며 서로의 생일을 핑계 삼아 그 날 만큼은 근사한 곳에서 한껏 치장을 하고 만났다. 아이들도 없이 마치 결혼 전의 그 시절처럼 맛있는 음식과 수다로 가득 채웠다. 지금 돌아보니, 우리 모두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눈부신 젊은 날을 일과 아이들, 남편, 시집 살이에 치어 살았다. 아마도 그 땐 생일을 빙자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이들이 초중고를 거치고 모두 성인이 된 지금, 헤쳐 모여를 반복하던 우리는 정예부대를 모아 또다시 생일파티를 시작했다.
늘어가는 주름과 처진 살만큼의 긴 시간을 함께 한 건 남편만은 아니다. 어쩌면 남편보다 더 많은 밥과 술을 먹고 마시고 속 깊은 수다를 떨어온 친구들, 오래 한 시간만큼 장단점을 서로 알고 그럼에도 함부로 마지노선은 침범하지 않는 예의를 지키며, 만나면 서로에게 술값을 아끼지 않고 받은 만큼 그 이상으로 못 돌려줘서 안달인 친구들, 벌써 수년에서 18년을 함께 했다. 또한이들은 지금 고스란히 필드를 함께 걷는 골프 멤버이기도하다.
지금은 거의 탈퇴했지만, 졸업 후 30년만에 꾸려진 대학 동창회의 여러 모임에서 내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일은 단톡방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일이었다. 겨우 이름 정도 아는 사람의 생일까지 입 발린 소리로 축하하거나 생일을 축하받는 일은 내 성격엔 솔직히 고역이었다. 결국 타인의 생일을 알려주는 카카오톡 알람을 끄고 또한 내 생일날 알림이 가지 않게 만들어도 카톡방엔 잘 모르는 동창들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가만히 있자니 쪼잔해 보이고 축하하자니 내키지 않는.
생일 축하뿐이 아니다. 잘 모르는 동창 부모님들의 부고 소식들도 솔직히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어떤 동창은 시간이 흘러 일을 다 마무리짓고도 문상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조차 하지 않기도 했다. 나이 50이 넘어도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라는 이야기는 아버지의 직업과 연봉이 궁금한 것이 아니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교육을 시켰는지를 묻는 것이란 것도 나이가 들어 깨달았다.) 결국은 방 탈퇴만이 사소한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길이었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사고방식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 맞는 친구들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진정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일은 가족을 포함해 진심으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으로 채우고 싶은 것이 나이가 들수록 간절해져 간다.
특별하고 멋진 핫플레이스가 넘쳐나는 요즘, 우리는 정보의 바다인 인스타와 블로그를 눈팅하며장소를 엄선하고가고 싶은 맛집을예약한다. 우리들의 생일은 진정한 축하와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다 컸고(더 커야 하지만) 남편 역시 다 컸다.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내조한 우리 모두가 이제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집중하며 더 건강하고 즐겁게 살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되었다. 예전엔 남편이, 큰 애가, 시어머니가 가 주어였다면 이젠 '내가~' '나는~' 그리고 '우리'가 주인공이 된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물론 우리모두가 이런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자란 아이들과 지지해주는 (아니, 눈감아주는) 남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이 든 여자에게 꼭 필요한 건 건강, 돈, 딸, 친구, 강아지라고들 한다. 일단 건강 딸 친구 강아지가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되뇌어 본다.
그럼에도 오이디푸스 왕의 서문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옳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태어나는 것은 맘대로 되지 않지만 죽음만은 최선을 다해 산 이후,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개개인이 그 시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올 때까지는 하루하루 매 순간, 나의 의무를 다하고 내 가족과 친구들과 많이 웃고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