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알면서 모른 척' 한다는 놀라운 지(知)적 소유자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크림이가 나를 '쥐락펴락하기 쉬운 하찮은 집사'로 인식한 후였다.
(그래도 내 짝사랑에 큰 변함은 없다)
美가 최고의 무기인 크림이
우리 집에 와서 뚱냥이가 될 정도로 건강하게 잘 자라던 크림이가 난데없이 변비에 걸려 주사 맞고 유산균을 먹으면서 호전이 되나 싶더니 콧물을 훌쩍이기 시작했다. 감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크림이의 조그마한 얼굴을 잡고 크림이 코에 내 입술을 대보았다. 열감이 있으면 무조건 병원행. 3일 내내 주사를 맞고 약을 타 왔다.
손바닥에 츄르를 짜서 유산균과 감기약을 섞어 주면 골골거리며 까끌한 혀로 내 손과 손가락까지 쪽쪽 핥아먹었다. 그 틈을 타서 크림이 머리와 뺨에 원 없이 뽀뽀를 한다!
감기로 인해 크림이의 밥맛은 또 떨어지고, 원래 있던 세 가지 사료에 참치캔에 츄르에 정성껏 대령을 해도 먹는 둥 마는 둥. 나중엔 츄르조차 종류를 가려가며 어떤 것은 먹고 어떤 것은 입도 안대며 까탈을 부렸다.
그래도 한 가지, 아그작 거리며 씹어먹는 것이 딱 한 개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집 순둥이 쿠키의밥이었다.
이거 개밥이야? 맛있어 맛있어 냠냠
쿠키 밥 한 알은 크림이 밥의 서너 배 되는 크기라, 한 알을 갖고도 꽤 오래 씹어먹었다. 바닥에 부스러기까지 질질 흘리면서. 아마 대여섯 알 정도 먹으면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우리 쿠키는 꽤 큰 그릇에 2/3 정도 채워주면 와르르 소리 내며 단 몇 분 만에 씹지도 않고 먹어 삼키는데...
(얘는 얘대로 쟤는 쟤대로 너무너무 너무 사랑스럽다.)
쿠키밥 vs 크림이 밥들
종류별로 부페식인데 쳐다도 안보는 알미운크림이
문제는 고양이가 개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 개밥엔 고양이에게 꼭 필요한 타우린이 없어서 고양이는 고양이 밥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우린은 조개류와 등 푸른 생선에 많은데
타우린이 부족하면 눈과 심장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면서 쿠키 밥으로 배를 채우게 할 순 없었다.
개가 고양이 밥을 먹는 건 별 문제도 되지 않고 못 먹게 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높은 곳에 올려놓으면 끝!
그러나 어디나 갈 수 있는 고양이로부터 개밥을 숨길 방법은 마땅치가 않다. 단 한 가지 방법은 쿠키에게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밥을 주고 안 먹으면 바로 치우는 것인데... 지난 10년간먹고 싶을 때만 먹어치우는 '자율 급식'을 즐겨온 쿠키에게 갑작스러운 시간제 배급은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안 그래도 크림이때문에 쿠키는 이미 여러 가지 손해를 보는 입장인데 그것은 안될 말이다. 뿐만 아니라 나도 정신없고 바빠서 딱 시간 맞춰 주기도 어렵다.
여시 크림이때문에 큰 고민이 생긴 것이다.
당장 수의사 선생님께, 크림이가 쿠키 밥만 먹는다고 큰 걱정을 했다.
타우린 운운하며 장님이 되거나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선생님은 지그시 날 보다가 "누가 그래요? 인터넷??!."
말문이 탁 막혔다.
"고양이 밥 나온 게 10년 조금 더됐는데 그럼 그 전 고양이들은 다 눈멀고 심장 이상생겨 죽었게요?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호랑이도 만드는 건데... 고양이 사료 업자들이 수의사들 모아 접대하고 세미나 열고 고양이 밥 팔게 하려고 애 많이 썼지요. 고양이 사료 회사에선 인터넷에 그런 정보 과장해서 올리고 댓글도 서로 달고... 어쨌든 크림이는 뭐든 먹어야 하니까 쿠키 밥이라도 먹게 둬요."
명의 수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에 일단 한숨을 돌렸다. 역시 믿을 만한 의사 선생님을 안다는 건 큰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