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에 빠진 지 3년째. 십수 년 전 미국에 잠시 머물렀을 때 심심풀이로 했던 골프를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소위 '머리 올리는' 첫 필드를 베테랑들과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멋지게? 정신없이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남편이 해줬다.
고작 20불이면 카트를 직접 운전하며 두사람도 18홀을 돌 수 있는 미국 퍼블릭 골프장에서, 날씨도 마음도 추웠던 초봄에 나는 남편을 따라 무턱대고 골프장에 갔다. 20대에 부모님이 다니는 연습장에 따라다니며 휘둘러본 게 다였다.
수십 년된 엄마채를 갖고 채의 구성은 무엇인지 스윙의 원리는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백지상태로 나갔다. 기억이 나는 건 허둥대는 나와 그 옆에서 '다시 쳐봐, 아니~~ 티를 꽂아야지.' 화를 참으며 연신 담배만 피우던 남편 모습이다.
첫 홀은 티를 꽂아 공을 올리고 드라이버로 날려야 하는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산책 나오듯 나온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치고 집에 왔는지도 기억이 없다.
딱 첫 홀의 그 장면. 스스로도 한심해서 배시시 웃으며 치던 기억. 두어 번 시도 끝에 드라이버샷으로 친 공은 떼굴떼굴 굴러가다 말았다. 나랑 골프 나갈 때마다 유난히 담배를 피우던 남편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후 채를 제대로 장만하고 레슨을 받고 같은 처지의 한국 아줌마들 두엇과 골프장을 다녔었다.
이게 골프구나~알 무렵 귀국했고 당연히 친한 친구들 학부모들과 골프를 다녀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초6 초4로 들어온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쁜 데다가 한국 골프장의 그린피에 기겁해 골프는 바로 접었다. 시간적 여유도 돈도 없었고 마음도 늘 바빴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와서 거기 올인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골프를 치는 친구도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가 가끔 땜빵으로 날 부르는 친구가 있었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골프장을 가려면 애들 학교 가는 것도 못 보고 나가야 했고 학교 가는 걸 보고 나가면 애들이 하교하는 걸 볼 수 없었다. 다 컸는데 그러면 좀 어떠냐고? 그러게...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땐 용납할 수 없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을 쓰면서 아이를 방치할 순 없었다. 또 돈 버는 주체인 남편도 골프를 안치던 때였는데 내가 골프를 칠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신사임당 코스프레하던 시절이었다.
굳이 골프를 하지 않아도 너무 바빴다. 영어에 재능이 뛰어난 큰 애는 국제중을 보낼 계획이 있었고 아직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둘째는 이것저것 시키며 세심한 뒷바라지가 필요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학원 설명회도 매일 다니고 하교 후엔 두아이 라이드로 쉴틈이 없었다. 게다가 틈틈이 학부모 모임도 다녀야 했다. 알짜 정보는 학부모 모임에서 나온다. 아이 둘 각각의 학부모 모임과유치원 때부터 강력한 본딩이 돼있는 친근한 모임등 서너 개의 모임을 기본으로 하고 각각의 소모임이 또 있었다. 학원정보 과목별 과외 선생 정보부터 육아 고민까지 공유하는 찐 모임이 있는가 하면 엄마와 아이들의 성격 공부 수준에 따라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모임도 있었다.
그렇게 8년... 아이들은 자랐고 어느새 골프를 치는 친구들이 늘어 있었다. 한가로운 브런치 모임(오전에 밥 먹는 모임)에 나가기만 하면 듣는 소리가 '너만 치면 팀 하나 된다'였다. 나는 여전히 남편도 안치는 골프를 나 혼자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요가와 사교모임 쇼핑으로 쓰고 있는 곳도 많아서 골프까지 칠 여유가 없다고 잘랐다. 게다가 미국에서의 골프도 딱히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어서 별 흥미도 미련도 없었다. 시간 돈 여유가 다 갖춰져야 치는 것이 골프라고 믿어서 단호하게
안친다고 했다.
그런 내가 골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니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갈수록 내주위 골프인구가 늘었고이야기 주제에 골프 얘기들이 올라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3년 전, 남편, 아이들, 그리고 갱년기 등의 복합적인 계기로 그렇게 집착하고 정성을 쏟았던 '가족'에 대한 모든 욕심을내려놓으며 나는 매우 자유로워졌다. 내가 스스로 옥죄고 묶었던 끈을 스스로 풀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나만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거창한 사유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년 1월, 그냥 8년 전 처박아둔 골프채를찾아 연습장에 등록하고 레슨도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골프는 여전했다. 티를 제대로 꽂을 줄도 몰랐던 미국에서의 첫날과 다름없이 안 맞았다. 미국에서 세명이 꾸준히 치러 다녔었는데... 어떻게 치고다녔는지 신기했다.혹시 꿈이었을까. 꿈이라기엔 같이 치던 멤버는 옆동네 살며 아직도 연락이 닿으니 꿈은 아닌데.
공 연습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다들 기립박수를 쳐주며 응원했다. 다시 시작한 골프는 처참했다. 나이도 먹었지, 잘못된 스윙 자세가 굳어져 오로지 공 맞추기 게임으로 골프를 쳐대니 공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었다. 그래도 필드가 급하니 프로도 자세보다 공 맞추는 스킬을 가르쳐줬다.나는 분명히 배운 대로 치는 것 같은데 공은 속절없이 구르기만 했다. 채를 하도 꽉 쥐어서손도 아프고 팔도 아팠다. 몸은 못 돌고 팔로만 휘둘렀다. 자꾸 팔에 힘을 빼라고 하면 그립 잡는 손아귀 힘도 빼서 채가 흔들렸다.왔다 갔다 엉망진창인데도 어느 날은 또 공이 착착 맞았다.
안 맞는 자세와 맞는 자세의 차이를 모르니 어떻게 치면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프로의 레슨도 별 소용이 없었다.
골프환경도 한국과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국에선 점잖은운동복에모자 쓰고 채만 들고 치면 되는 게 골프였는데 한국은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패션이었다. 물론 채도 중요했지만 공을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는 내가 채 탓을 할 단계는 아니라고, 프로가 말해주었다.
레슨 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친구들이 필드 약속을 잡았다. 가장 친한 '눈이 큰 친구'에게 옷 등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고맙게도 몇 가지 옷을 주었다. 바람막이, 이너 티. 그리고 큰맘 먹고 골프옷을 샀다. 초기 비용이 생각보다 꽤 많이 들어가자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담근 발을 뺄 수는 없었다. 드디어 한국에서의 첫 필드가 내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