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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Dec 16. 2021

내가 골프를 치다니!

골프 입문기

골프에 빠진 지 3년째. 십수 년 전 미국에 잠시 머물렀을 때 심심풀이로 했던  골프를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소위 '머리 올리는' 첫 필드를 베테랑들과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멋지게? 정신없이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남편이 해줬다.

고작 20불이면 카트를 직접 운전하며 두사람도 18홀을 돌 수 있는 미국 퍼블릭 골프장에서, 날씨도 마음도 추웠던 초봄에 나는 남편을 따라 무턱대고 골프장에 갔다. 20대에 부모님이 다니는 연습장에   따라다니며 휘둘러본 게 다였다.


수십 년된 엄마채를 갖고 채의 구성은 무엇인지 스윙의 원리는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백지상태로 나갔다.  기억이 나는 건 허둥대는 나와 그 옆에서 '다시 쳐봐, 아니~~ 티를 꽂아야지.' 화를 참으며  연신 담배만 피우던 남편 모습이다.

첫 홀은 티를 꽂아 공을 올리고 드라이버로 날려야 하는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산책 나오듯 나온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치고 집에 왔는지도 기억이 없다.


딱 첫 홀의 그 장면. 스스로도 한심해서 배시시 웃으며 치던 기억. 두어 번 시도 끝에 드라이버샷으로 친 공은 떼굴떼굴 굴러가다 말았다. 나랑 골프 나갈  때마다  유난히 담배를 피우던 남편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후 채를 제대로 장만하고 레슨을 받고 같은 처지의 한국 아줌마들 두엇과 골프장을 다녔었다.




이게 골프구나~알 무렵 귀국했고 당연히 친한 친구들 학부모들과 골프를 다녀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초6 초4로 들어온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쁜 데다가 한국 골프장의 그린피에 기겁해 골프는 바로 접었다. 시간적 여유도 돈도 없었고 마음도 늘 바빴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와서 거기 올인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골프를 치는 친구도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가 가끔 땜빵으로 날 부르는 친구가 있었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골프장을 가려면 애들 학교 가는 것도 못 보고 나가야 했고 학교 가는 걸 보고 나가면 애들이 하교하는 걸  볼 수 없었다. 다 컸는데 그러면 좀 어떠냐고? 그러게...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땐 용납할 수 없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을 쓰면서 아이를 방치할 순  없었다. 또 돈 버는 주체인  남편도  골프를 안치던 때였는데  내가 골프를 칠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신사임당 코스프레하던 시절이었다.


굳이 골프를 하지 않아도 너무 바빴다. 영어에 재능이 뛰어난 큰 애는 국제중을 보낼 계획이 있었고  아직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둘째는 이것저것 시키며 세심한 뒷바라지가 필요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학원 설명회도 매일 다니고 하교 후엔 두 아이 라이드로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틈틈이 학부모 모임도 다녀야 했다. 알짜 정보는 학부모 모임에서 나온다. 아이 둘 각각의 학부모 모임과 유치원 때부터 강력한 본딩이 돼있는 친근한 모임 등 서너 개의 모임을  기본으로 하고 각각의 소모임이 또 있었다. 학원정보 과목별 과외 선생 정보부터 육아 고민까지 공유하는  찐 모임이 있는가 하면  엄마와  아이들의 성격 공부 수준에 따라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모임도 있었다.


그렇게 8년... 아이들은  자랐고  어느새 골프를 치는 친구들이 늘어 있었다. 한가로운 브런치 모임(오전에 밥 먹는 모임)에 나가기만 하면 듣는 소리가 '너만 치면 팀 하나 된다'였다.  나는 여전히 남편도 안치는 골프를 나 혼자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요가와 사교모임  쇼핑으로 쓰고 있는 곳도 많아서  골프까지 칠 여유가 없다고 잘랐다. 게다가 미국에서의 골프도 딱히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어서 별 흥미도 미련도 없었다. 시간 돈 여유가  다 갖춰져야 치는 것이 골프라고 믿어서  단호하게

안친다고 했다.


그런 내가 골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니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갈수록 내 주위 골프 인구가 늘었고 이야기 주제에 골프 얘기들이 올라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3년 ,  남편, 아이들, 그리고 갱년기 등의 복합적인  계기로 그렇게 집착하고 정성을 쏟았던 '가족'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으며 나는 매우  자유로워졌다. 내가 스스로 옥죄고 묶었던  끈을 스스로 풀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나만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거창한 사유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년 1월,  그냥 8년 전 처박아둔 골프채를 찾아 연습장에 등록하고 레슨도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골프는  여전했다. 티를 제대로 꽂을 줄도 몰랐던 미국에서의 첫날과 다름없이 안 맞았다. 미국에서 세명이 꾸준히 치러 다녔었는데... 어떻게 치고 다녔는지 신기했다. 혹시 꿈이었을까. 꿈이라기엔 같이 치던 멤버는 옆동네 살며 아직도 연락이 닿으니 꿈은 아닌데.


공 연습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다들 기립박수를 쳐주며 응원했다. 다시 시작한 골프는 처참했다. 나이도 먹었지, 잘못된 스윙 자세가 굳어져 오로지  공 맞추기 게임으로 골프를 쳐대니 공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었다. 그래도 필드가 급하니 프로도 자세보다 공 맞추는 스킬을 가르쳐줬다.  나는 분명히 배운 로 치는 것 같은데 공은  속절없이 구르기만 했다. 채를 하도 꽉 쥐어서 손도 아프고 팔도 아팠다. 몸은 못 돌고 팔로만 휘둘렀다. 자꾸 팔에 힘을 빼라고 하면 그립 잡는 손아귀 힘도 빼서 채가 흔들렸다. 왔다 갔다 엉망진창인데도 어느 날은 또  공이 착착 맞았다.

안 맞는 자세와 맞는 자세의 차이를 모르니  어떻게 치면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프로의 레슨도 별 소용이 없었다.


골프 환경도  한국과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국에선  점잖은 운동복에 모자 쓰고 채만 들고  치면 되는 게 골프였는데 한국은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패션이었다. 물론 채도 중요했지만  공을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는 내가 채 탓을 할 단계는 아니라고, 프로가 말해주었다.

레슨 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친구들이 필드 약속을 잡았다. 가장 친한 '눈이 큰 친구'에게 옷 등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고맙게도 몇 가지 옷을 주었다. 바람막이, 이너 티. 그리고  큰맘 먹고 골프옷을 샀다. 초기 비용이 생각보다 꽤 많이 들어가자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담근 발을 뺄 수는 없었다. 디어 한국에서의 첫 필드가 내일로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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