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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Jun 04. 2022

은인을 찾습니다.

30년 전 장흥에서의 악몽

가끔씩 나는 그 일을 떠올린다.

그 일을 추억? 하면 현재의 내 존재에 내 일상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세상의 모든 신께도 감사드린다. 이 사건은  늘 냉담 중인 내게 어서 성당으로 돌아가라는 채찍일 때도 있고 삶에 오만해질 때 금세 옷매무새를 여미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또한 신앙의 간증으로 쓰일 때도 있다. 누구에게나 생을 바꿀 뻔한 위기는 있지만 글쎄, 나 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932월쯤이었을까?

미국  학생 연수에 참가한 후 친해진 문과 숙, 우리 셋은 장흥에 놀러 갔다. 그때 장흥은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했던 가깝지 않은 곳이었다. 데이트 장소로 유독 인기가 많았지만 이렇다 할 남자 친구 하나 없던 나는 이 곳을  여자 친구들과 가끔씩 다녔다.

먹고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졌다. 7~8시쯤 됐을까 문과 나는 어쩌면 걱정하실 부모님께  전화를 하기로 했다. 믿을 수 없지만 폰이 없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공중전화가 여기저기 있던.

술이 취한 숙은 우리끼리 전화하고 오라고,  남아있겠다고 해서 문과 나만 주막을 나섰다. 지금 같으면 몇백 원 낼 테니 전화 좀 쓰자고 주막에 부탁해도 될 일이었는데 20대의 우리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그런 부탁은 수줍어서 감히 할 줄도 몰랐다.


공중전화는 주변에  없었다. 술집이 늘어선 복작거리는 거리에 떠다니는 수많은  인파를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컴컴한 넓은 공터 끝에 희미한 가로등과  3층짜리 신축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앞에 반갑게 오렌지색 공중전화가 있었다.

문과 나는 공터 끝으로 한참을 걸어가 동전을 넣고 전화를 했다. 문이 먼저 했다.

'엄마 난데 나 H언니 S언니랑 장흥 왔어. 이제 곧 갈 건데 9시 넘을 거야.'

그다음 내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가고 엄마의 ㅡ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  나는 듣고 보았다!


공터를 지나던 그랜저가,  우리 둘을 발견하고 끼이이익~~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급히 핸들을 꺾어 우리 쪽으로 돌진하는 것을.

그리고  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급히 섰고 동시에 네 짝의 차 문이 열리며  네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큰 몸집의 사내들이 내려서 슬로 모션처럼 우리 쪽으로 달려 왔다.  네 명의 사내중 한 명은 심지어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그가 제일 빨랐다!!


 엄마의 여보세요 소리를 듣는 순간과  차량의 급작스런 돌진,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찰나에 일어났다. 육식 동물에 쫓기는 초식 동물처럼 저녁이면 나는 늘 예민했다. 어두워지면 어딜 가든 주변을 살피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버릇이 있었다. 아빠의 엄한 교육 덕분이었다

 육감은 정확히 발동했고, 나는 찰나의 순간 수화기를 내던지고  제대로 상황 파악도 못하고 있던 후배인 문 밀치며 소리쳤다.

"야 ! 뛰어!."

우리는 그 건물로 정신없이 뛰어올라갔고  3층에 노래방이 있었다. 급히 뛰어들어가 노래방 주인에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저씨!! 저희 좀 숨겨주세요!! 누가 쫓아와요!!!"

백짓장같이 새하얗게  질린 여자아이 둘의 얼굴을 보고 뭔가를 직감했는지 노래방 주인은 서슴치않고 카운터 앞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 탁자 밑에 숨는 순간 그들이 들어왔다. 안은 깜깜했고 밖은 훤해서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행방을 묻는 것 같았고 아저씨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모른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금 서성이다 이내 나갔다.

우리들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고 노래방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한참 후에야 노래방을 나섰다. 바로 나가면  그들을 마주칠 것이 뻔하니까.


혼비백산해서 다시 주막으로 돌아오니 혼자 남았던 숙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급히 깨우고 어서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숙은 우릴 보더니 우리끼리 집에 간 줄 알았다며 투덜댔다.

다리에 자꾸 힘이 풀렸지만 당장  짐을 챙겨 뒤도 안 돌아보고 장흥을 빠져나왔고  남편과 연애를 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은 장흥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너무나 무서웠던 기억이었기에 우린 서로 그 일을 쉽게 입 밖에 내지도 않았고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 일을 잊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 몇년 후,  친구들과 귀신 체험  비슷한 이야기들을 나눌 때 무용담을 늘어놓듯 이야기하곤 했다. 다들 천운이었다고 얘기해줄 정도로 그 일은 정말...


결혼 후 딸애를 낳고 누워있던 어느날, 문득 그날  일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설마 하며 조금만 대처를 늦게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오금이 다 저렸다.

돌이켜보면 지금 내 기억에 손님이 하나도 없던, 조용했던 노래방.  당시는 인신매매가 횡행하던 때였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조금이라도 그 아저씨가 나쁜 맘을  먹었더라면, 눈짓으로 우리 있는 곳을 알려주고 두둑한 보상금을 받고 팔아넘겼을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 하나 없는 노래방 건물은 실제로 존재하긴 했던 곳일까?  나는 왜 그 다음에 바로 그에게 사례를 하지 못했을까?  그는 귀인이자 은인이었는데.


나와 함께 그 일을 겪었던 문은 결혼 후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내가  지난 08년 즈음,  남편을 따라 아이들과  미국에 갔을 때 070 전화를 놓고 문과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  만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같은 미국이라 반가웠다.

우리는 이내 그때 그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우리 그때 정말 큰일 날 뻔했지 ㅠ."

"그러게ㅠㅠ"


너무나 면목없지만 지금이라도 장흥 입구 공터에서 3층짜리 노래방을 했던 그 분을 만날 수 있을까?

문과  나를  구해주기 위해 하느님이 뚝딱뚝딱 그 건물 3층에 노래방과 천사를 마련해주신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만나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기적이고 편향적이며 가끔은 오만한 내게 늘 꾸짖음을 주는 그 무서운 경험은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지를  또한 얼마나 신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 지를 일깨우는 회초리와 같다. 

수많은 범죄는 티비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남의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 또한 내가 받은 그 행운의 손길과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남들에게 돌려줘야한다는 빚도 늘 맘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 현재도 세계 곳곳에 얼마나 많은  끔찍한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되는 밤이다.

 이 글을 읽는 이웃작가님들 중  혹시 그 노래방 건물을 기억하는 분은 없을까?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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