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이 얼굴이 어느 여배우보다도 이뻐서, 또 하나는 온 집 안을 떠다니는 크림이의 털 때문에.
까만 눈동자를 하고 야옹 야옹 내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거는 크림이를 보며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열에 일곱은 바깥 구경하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과 간식(츄르)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야옹~야옹~ 저렇게 이쁜 얼굴로 야옹거리는데 뭐든 해주고 싶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야옹거린다고 한다. 고양이들끼리 야옹 소리를 낼 때는 짝짓기를 위해 짝을 구할 때뿐, 오랜 시간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야옹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 놀라운 사실을 알고난 후 크림이의 야옹 소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야옹야옹할 때마다 그저 황송해서 "오야, 그래그래 뭐해줄까? " 굽신거리는 집사 노릇을 해서인지 크림이는 때로 새벽에도 당당하게 야옹야옹하며 창문에 매달려있기도 한다. 창문을 당장 열어달란 것이다. 새벽 4~5시에. 어찌나 야옹거리는지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또 포기가 빠르다. 영리하기까지 한 크림이.
방학을 맞아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는 크림이 보고 싶다고 잔뜩 기대를 하며 오자마자 크림이를 껴안고 뽀뽀를 퍼붓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안 하던 재채기를 하고 눈까지 벌게져 병원엘 가더니 고양이 털 알레르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며 속상해 했다. 커다란 약봉지엔 눈에 넣는 안약과 먹는 약이 잔뜩 들어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우리 크림이가 함께한 지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났는데, 갑자기?!
원래 우리 아이들에겐 진드기 알레르기와 털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쿠키만 키울 땐 딸은 전혀 반응이 없었고 아들이 조금 증상을 보였을 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크림이가 온 이후아들의 재채기가 조금 심해지긴 했지만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은 영국으로 딸은 기숙사로 떠나 우리 집은 쿠키 앤 크림이의 집이 되었다. 의사의 말은 바로 우리 딸이 크림이와 떨어져 지냈다가 다시 마주하니 본격적으로 심해진 것이라고 한다. 지내다보면 적응이 되어 괜찮다가 떨어졌다 다시 만나면 또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에구 우리 이쁘고 귀한 딸 어쩌면 좋을까. 크림이를 딴 집으로 보내야 하나?" 영혼 없는 말로 위로를 했더니,
"맘에도 없는 소리!"
"앗, 들켰네!." 우리는 웃었다.
카톡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어쩌면 좋아?"
남편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약 먹으면 돼. 요즘 알레르기약이 얼마나 좋은데. 더군다나 애들은 곧 떠나잖아"
역시 내 남편이다.
나 또한 딸에게 단단히 일렀다.
"크림이를 최대한 멀리하고 네 방에 못 오게 하고 관상용으로만 봐라. 너무 이뻐서 쉽지 않겠지만.."
딸아이는 우울해지고 말았다.
이제 크림이 델고와 같이 잔다고 딸아이와 싸울 일도 사라지는 거다.(야호! 이제 크림이는 안방에 있어야겠군)
그러나 딸아이는 약을 먹어가며 크림이를 안고 뒹굴었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이 없을 땐 생각나면 하던 청소를,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기포와 물걸레로 밀고 청소기를 구석구석 돌리고 이불을 자주 빨고 건조기에 바싹 말렸다. 크림이 덕분에 나는 부지런해지고 집은 점점 더 깨끗해질 것이다. 이래서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신경을 곤두세워 청소를 하다 보니, 막연하게 털이 많이 빠지는 것으로 알았던 크림이의 털 빠짐은 심각했다. 크림이를 잡아놓고 빗질도 여러 번 했다. 빗질을 하면 금세 크림이 아기 같은 털 뭉치 몇개가 생겼고 이상하게 빗기면 빗길 수록 털이 더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아 허탈했다. 크림이도 자기의 털 뭉치를 호기심 있게 보고 코를 킁킁거렸다. 빗질을 끝낸 직후에도 야옹하며 돌아다니거나 꼬리를 탁탁 칠 때마다 털이 날렸다. 허탈을 넘어 신기했다.
빗질후 청소기에 담긴 털뭉치.
알레르기가 뭔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던 나도 크림이를 안고 뽀뽀를 한 후에는 가끔씩 재채기가 나고 얼굴이 가려워서 세수를 해야 했다. 하루는 내가 즐겨 입는 캐주얼한 검정색 면 원피스를 입고 쿠키와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맙소사, 크림이 얼굴도 못 보고 나온 이른 아침인데, 옷장에서 꺼내 바로 입고 나오면서 크림이와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햇빛 아래서 보니 크림이의 털이 원피스 앞판 여기저기 가득 묻어 있었다. 옷을 입고 안방 마루 현관을 지나는 동안 흩날리던 크림이 털이 묻었다는 얘기다. 그뿐인가, 얼마 전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지에서 옷을 꺼내 옷장에 걸다가 이 옷 저 옷에 크림이의 털이 발견돼서 남편이랑 한참을 웃었다. "크림이는 비행기도 같이 타고 심지어 이 먼 곳까지 따라왔네." 크림이에 비하면 우리 충성스러운 쿠키는 털 빠짐이 제로라고 볼 수 있다.
알고 보니 크림이의 정체는 하루 종일 실잣는 요정처럼 끊임없이 '털을 잣는 고양이'였던 것이다. 사료를 먹고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는 모든 영양소가 다 털을 자라게 하는 것만 같다.
그루밍에 진심인 크림이는 온종일 틈만 나면 손과 발뿐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을 열심히 핥는다. 그 많은 털을 가장 많이 먹는데도 나는 아직 크림이가 뱉은 헤어볼을 본 일이 없다. 아마 어딘가 토해놓아야 했을 텐데 걱정이다.
내가 고양이 털에 대한 진실을 가감없이 이렇게 토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많은 고양이들이 바로 이 털빠짐때문에 파양 당한다. 냥이 털이 많이 빠지는 사실은 알았는데 이정도인 줄은 몰랐다며 키우기를 관두는 사람들.
내 식구의 코를 간지럽히고 재채기를 유발하며 때로 심할 땐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집에서 내쫓겨야하는 고양이는 말은 못해도 그 마음은 어떨까? 처음엔 가족이라며 데려와놓고!!
동물을 입양하면서 사람들은 '우리 아기' '내 가족'이라 표현하지만 약으로 조절되는 알레르기 증상에도 아주 쉽게 파양을 결정한다. 우리 아기라고 내 가족이라고 불렀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 크림이도 또 다른 고양이 남매와 같이 부유한 집에 입양돼 사랑받고 한껏 귀여움을 받다가 그 집 누군가 알레르기가 생겼다고 내동댕이쳐졌다. 형제와 떨어져 강아지가 있는 낯선 우리집으로 왔다. 표현은 못해도 무섭고 슬펐을 것이다.
누군가 고양이를 입양하려거든 이런 진실을 알고 받아들이길, 또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면 약이라도 먹어가며 끝까지 책임져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자신이 없다면 랜선 집사로 남길 바란다. 이런저런 이유로 파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로 한마리는 물론 서 너마리 또는 그 이상의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내 아이가 알레르기가 생겼다고 가족으로 들인 동물을 책임감없이 쉽게 버리는 부모의 모습이야 말로 '그토록 소중한' 내 아이에게 결코 좋은 교육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