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한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1. 조커 가면
오랜만에 만난 A언니와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신한 A언니와 한산한 지하철 1호선 노약자석에 같이 앉았다. 웬 조커와 같이 공포스럽게 웃고 있는 가면을 쓴 남자가 다가와서 우리 앞에 서더니 우리를 빤히 계속 본다. 우린 정말 놀랬지만 의식하지 않는 듯 둘이 하던 얘길 계속했다. 그렇지만 임신한 언니가 걱정됐다. 조커는 손가락으로 우리에게 말을 했다. 빈자리 하나를 가리키길래 나도 손가락으로 너도 거기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약자석이니 너네 둘이 저리 가라는 뉘앙스의 손짓을 한다. 내가 언니를 가리키며 임신한 포즈를 취한다. 그러니 조커가 날 빤히 쳐다본다. 난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난 임신 안 했으니 일어나라고?' 했다. 맞다. 일어나란다. 난 됐다고, 사람들도 많지 않아 빈자리도 많은데 난 그냥 여기 있을 거라고 고개를 흔들며 손으로 노약좌석의 빈자리들을 가리켰다. 내가 왜 니 명령을 따라야 하냐는 마음과 무서운데 그냥 말을 들을까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조커는 우릴 한참을 빤히 보더니 다음칸으로 넘어갔다. 1분 정도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이 모든 대화를 했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를 매우 궁금해했다. 살짝 보니 그는 다음 칸에 자릴잡고 앉아있고 사람들은 애써 그를 외면하고 있다.
2. 용기 할부지
불길한 마음에 우리는 노약좌석을 떠나 자리를 옮겼고 다행히 바로 자리가 나서 언니는 앉고 난 서있었다. 지하철에 가끔 등장하는 소리 지르며 세상한테 내 얘기 좀 들으라는 할아버지 등장. 기독교, 천국, 십일조 얘기들이 나왔지만 예수를 믿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메시지. 주메시지는 "용기를 내야지!"였다. 그런데 이런 할부지를 그동안 많이 봤지만 오늘의 독특한 점은 용기를 내라면서 사람들을 찰싹 때린다. 내 옆옆 사람이 찰싹 맞았다. 아프게 맞았는데 언제 맞았냐는 듯 모른 체한다. 그걸 보자마자 난 빵 터졌고, 내 뒤편 다리깁스한 아줌마에게 "말을 안 들어 다쳤다"며 힘을 내라 하며 한 대 때렸다. 깁스아줌마는 왜 간섭이냐며 신경질을 냈고 난 미친 듯이 흐느끼며 웃었다. A언니는 할부지와 얼굴을 대면해 있었기에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두려워 억지로 웃음을 참았고 그러는 사이 아저씨는 내 옆에 와 A언니 옆 사람의 다리를 때렸다. 그 아저씨는 피식 웃었다. 난 언제 날 때릴지 모르는 스릴 만점의 상황과 웃다가 들키면 무슨 험한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눈치 없게도 웃음은 멈추지 않고 배는 찢어지듯 아팠다. A언닌 살겠다고 얼굴은 뻘게 가지고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 휴! 다행히 들썩거리는 내 어깨를 못 보고 할부지는 지나갔고, 어떤 아저씨가 "아 씨바" 했더니 멈칫하시며 "그러니까 용기를 내"하시면 다음 칸으로 이동하신다.
3. 애니팡 아줌마
A언니 바로 옆 아줌마는 용기 할부지의 소란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한창 유행인 애니팡에 열중이셨다. 난 그러려니 하면서 언니와 오늘 1호선에 뭔 일 있냐며, 우리 계 탄 날이라 했다. 그러는데 애니팡 아줌마 옆 나이 지긋한 점잖게 생긴 아줌마가 애니팡 아줌마의 게임을 계속 주시한다. 누가 봐도 아는 사람처럼 거의 폰의 지분을 반을 가져갔다. 한참을 움찔움찔거리며 쳐다보더니 갑자기 애니팡을 맞추려고 손가락으로 폰화면을 긋는 게 아닌가. '펑펑! 펑펑' 점보가 성공! 그러면서 그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순간 A언니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언닌 이건 또 뭐냐는 눈빛.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모양으로 '설마설마'를 외쳤다. '아는 사람일 거야'를 계속 되뇌었지만 그 후 바로 점잖은 아줌마는 지하철에서 내렸고, 애니팡 아줌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애니팡에 열중했다. 결국 들은 초면이었고 점잖은 아줌마가 힐끗힐끗 구경하다 방법을 터득했고, 애니팡 아줌마가 찾지 못해 머뭇거릴 때를 틈타 재빨리 손을 뻗어 방울을 터트려준 것이다. 왜? 왜? 모르는 사람 애니팡을 해주냐고???!! 왜!!!!!!
이 와중에 무릎 위에 손으로 쓴 종이를 올리며 좀 도와달라 하는 몸 불편한 청년이 우리 칸에 온 것은 이전 사람들에 비해 우리에겐 별일이 아닌 평범하고 평화로운 풍경일 정도였다. 그 밤 9시경 수원행 지하철 1호선 우리 칸에 우리 웃으라고 일부러 연극배우들을 투입한 거 아닐까? 트루먼쇼인가? 내가 먼저 지하철에서 내리고 옆 칸을 보니 용기 할아버지가 옆 칸에 여전히 계셨고, 집에 도착할 무렵 A언니에게 온 카톡 메시지. "조커! 또 돌아다닌다" 그 두 분은 수원에 볼일이 있으신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