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Jun 26. 2023

경원敬遠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않음

깊이 침잠하는 날이 있다. 내가 칼을 흔들었거나 내가 칼로 베였거나 아님 서로의 칼로 서로를 베었을 때이다. 의도를 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런 일은 일어났고 수습이라는 건 할 수가 없다. 이미 베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포커페이스가 중요하다. 관계를 끝내려면 화내면 되고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의 의도에 맞는 적당한 표정으로 대처해야한다. 그러나 그 적당한 지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으며 나는 그런 적당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보통 나의 얼굴은 나의 마음보다 더 솔직하다. 나를 빼고 모두는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집에 돌아와 복기한다. 애들 밥을 줄 때도 샤워할 때도 머리에 계속 맴돈다.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나갈 생각을 않는다. 왜 그런 말들이 오고갔고 그 말을 했을 때 나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그의 마음은 어땠을지. 그와 나의 이전 이력은 어떠했는지. 내일 다시 만나면 나는 어떤 표정과 어떤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의도와 그도 모르는 그의 의도를 알게 되고 부끄러워진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건강하게 반응하지 못할까.


이런 일들은 삶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이런 크고 작은 이런 무형의 칼싸움이 유독 잦아지는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땐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끌고 나가는 것에 에너지를 쓰느라 좀 힘들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거리를 두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Good이지 않아도 되고, 그도 나에게 Good이지 않아도 된다. Bad가 아니라면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Bad일 때가 잦아지면 그때 바로 ‘경원敬遠’(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않음)할 때이다. 우리에게는 시간과 물리적인 거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도 그런 그도 서로에게 Bad이지 각각은 Good인 사람이다. 그는 그라서 그렇게 했고 나는 나라서 이렇게 했다.


모두에게 Good일 수 없다. 깊은 성찰을 통한 각각의 성숙은 필요하지만 그건 각자의 몫이고 다른 사람의 성숙까지 내가 신경 쓸 건 없다. 나를 통한 그의 성숙은 더더욱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불나방처럼 불살라지려는 마음이 아니면 굳이 그 관계 속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서로의 모양이 달라 부딪혔으니 모양이 같은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거나 모양이 비슷해져서 덜 아플 때 다시 만나도 되는 것이다. 사람이 상처고 사람이 회복이다. 상처입은 상태에는 비슷한 모양의 사람들을 통해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잦은 칼싸움으로 상처 입은 상태라면 경원하자.

이전 07화 정답기도 하여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