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운 사람들의 살구꽃 피는 마을
집에 머무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하루 중 산책은 가장 큰 일과가 되어가고 있다.
따스한 햇살이 점점 짙어지던 지난 한 달 간, 봄꽃이 피어날 꽃나무들을 매일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은 설레는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주 오래 전 파키스탄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끝없이 봄이 피어나길 기다리던 추억이 계속 겹쳐지면서, 마음속으로 종종 봄 여행을 떠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꽃만큼 환하고 밝은 마음들 잊지 않고 잘 간직하는 나날들 되길 바라요. :)"
<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 의 그곳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중에 <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라는 작품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바람 소리 마저 휘휘 들릴 것 같은 이 곳을 모티프로 만든 작품. 바로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이다.
배낭 여행자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곳.
세계 3대 블랙홀 중의 하나라는 곳.
모든 것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만 여행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이 곳 만큼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는 길의 악명 덕분에 훈자마을이 배낭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 여행 좀 했어!’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건 봄꽃일 것이다.
살구꽃 피는 히말라야 오지 마을!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는 그 풍경.
훈자 마을은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듯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인도 최북단 라다크에서 갈 수 있는 끝까지 가다 보면, 누브라 밸리 안에서도 뚜르뚝(Turtuk)이라는 지역에 닿게 된다. 그곳에서는 인도 지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에메랄드빛 푸른 눈망울의 너무나 이국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외모와 훈자 사람들의 생김이 거의 비슷하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거친 자연 환경에 고립되어 버려 자신만의 역사와 문화를 오랫동안 지켜 오고 있는 진정한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일지도 모른다.
우선 파키스탄 비자를 받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하긴 앙숙으로 여겨 지는 인접국 인도에서 받을 것인가 아니면 생뚱 맞게 태국에서 받을 것인가? 그나마 가장 쉽고 적어도 ‘비자를 받게 될 확률이 높은' 곳은 한국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그렇게 나는 1여 년이 넘는 여행을 잠시 재정비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볼 겸 한국으로 잠시 들어 왔다. 파키스탄을 간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다. 영리하게 이 곳을 미리 계획하고 비자를 준비해서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무엇보다 이 곳을 가기 위해서는 예외적으로 초청장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파키스탄에 있는 숙소 운영자의 명의를 빌리는 대신 가격을 지불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파키스탄 비자를 받아 들고서 드디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핀 파라다이스와도 같을 그곳을 상상하면서 먼저 인도로 입국했다.
훈자, 훈자 하더니! 진짜네!
비행기를 타고 파키스탄으로 바로 들어갈 수도 있겠으나, 쉽게 가고 싶지가 않았다. 인도에서 북쪽으로 가면 암리차르라고 하는 시크교의 중심인 황금사원이 위치한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 가기 위한 육로의 마지막 지점이다. 내 발로 당당히 걸어서 인도-파키스탄 국경인 와가 보더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드디어 나의 여권에 파키스탄 입국 도장을 받고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어섰다.
드디어 왔다, 파키스탄!
오랜만에 미지의 세계와 앞으로 펼쳐질 한치 앞을 모르는 시간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좋다!
라호르에 닿아서 낡은 호텔에서 하루를 쉬고 5시간 버스를 타고 모래 바람 날리는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미리 알아 두었던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드디어 훈자 행 버스! 2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그건 암묵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 나의 목적지. 변수에 따라서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그곳. 저녁 5시쯤 훈자행 버스에 올랐다.
이제 이런 버스에 타는 것쯤은 너무나 익숙하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도착해 있겠지,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늘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이제는 제법 요령도 생겼다. 파키스탄은 인도 못지 않게 현지 남자들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장거리 버스에 그저 앉아 있다가 옆, 뒤에서 오는 남자들의 손길에 놀랐다거나 그 손을 반대로 손봐주었다는 그런 말들을 들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왠만하면 그들로부터 떨어진 뒷 쪽의 좌석에 앉기도 했거니와, 긴장한 티는 하나 없이 자신만만하면서도 무심한 여행자의 태도로 앉아 있는다.
설산을 바라 보며 무릉도원에서 짜이를 마시는 기분이란!
살구꽃이 피기까지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이 마음이 큰 만큼 시간이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을 어슬렁 어슬렁 산책해 보기로 한다.
마을 아래 쪽으로 내려 가다 보니, 한 아저씨가 살구꽃 나무 밑에서 밭을 갈고 계신다. 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옆에 붙어 살짝 쳐다 보았다. 한참 동안 일에 집중하시던 아저씨가 내 존재를 뒤늦게 문득 알아 차리셨다.
여유로운 오후에 짜이 한 잔을 권하신다.
그렇게 세상 가장 아름다운 마당에서 짜이를 마신다. 아직 지난 겨울의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아름다운 히말라야 자락을 바라 보면서.
내 옆의 고양이와 햇살을 친구 삼아.
설산과 햇살의 아름다움이란.
이 곳만이 지닌 여유로움이란!
봄이 오길 기다리며
그런데 살구꽃이 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듯했다. 이제 봉오리가 맺힌 듯했으니, 적어도 2주 정도는 기다려야 하려나 보다. 이럴 수가! 평년에 비해 오히려 늦었는가 싶어서 서둘렀는데, 아직 훈자는 꽁꽁 겨울이었다.
흠… 여행자 수를 손에 꼽을 수 있는 이 곳에서, 그것도 친구처럼 툭툭 얘기 건넬 수 있는 한국 여행자 하나 없는 곳에서, 동양 여자가 혼자 다니니 다들 신기하게 쳐다 보는 이 곳에서 나는 2주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곳이야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 풍경을 2주동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게 숙소 근처 카리마바드 지역을 슬슬 걸어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유난히 예쁜 훈자 여자 아이들이 개울가에 앉아서 서로의 손에 헤나를 해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서 옆에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내게도 갑자기 앉으란다. 내 몸을 바위 턱으로 이끈다. 그렇게 어느새 아이들의 얘기에 따라 점퍼 소매를 둥둥 걷고 있었고, 이들의 그림이 이내 내 손등 위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감각은 그들의 유전자 속에 있나 보다. 이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오리엔탈적인 문양들이 이내 이 꼬마의 손길에서 펼쳐 진다. 보아 하니 딱 정해진 도안도 아닌 듯했다. 그저 손길 가는 대로, 그들의 마음에 일으켜 지는 대로 문양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내 손등에는 너무나 예쁜 꽃들이 한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직접 해주던 아이도,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친구들도, 받은 나도 즐겁고 신이 나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이 순간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 장면이 그림같이 느껴질 만큼 예뻤다. 너무나 순수하면서 빛나는 한 순간이 봄꽃보다 더욱 소중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