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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Sep 18. 2017

YOLO와 김생민의 영수증

지금도 그렇지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방송과 잡지 등의 매체 곳곳에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고 하는 단어가 넘쳐 나고 있었다. 나는 이 단어를 몇 년 전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 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매우 다르게 안정적이고 한국에서 평균적으로 보일 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이 내게 말했다.

'언니가 완전 욜로네!'

헉!

'응? 니가 그 단어를 어떻게 알아?'

내 동생은 밖으로 싸돌아 다니고, 국내에 정착해서도 잠시도 가만 있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 다니고 새로운 것들이 있으면 궁금해서 호기심이 가득한 나에 비하면, 선생님이라는 직업만큼이나 나와 다른 본성을 지녔기에 동생이 이런 단어를 아는 것 자체가 내겐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욜로(YOLO).

사실 인정은 한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전형적인 욜로적인 삶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런데 나는 매체에서 이 단어를 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욜로는

'내가 지닌 이 인생이 한 번뿐인 것이기에 하고 싶은 것들 당장 하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온 순간을 다 내던지듯이 살자'

이런 것은 아니다.


'내가 단 한 번밖에 지닐 수 있는 이 인생을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각자의 가치관과 관점에 따라 열심히 소중하게 살자!'

추상적이지만 욜로는 내게 그렇게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느낌의 단어였었다.


그러나 내가 미디어에서 접하게 되는 욜로라는 단어는 무언가 생각 없고 충동 지향적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과시와 허세적 성향도 포함하거니와 내일은 생각지 말고 오늘이 끝인 것처럼 살아 버리자! 와 같이 부정적이고 철없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역시나 소비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미디어의 특성이 녹아든 결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국 특유의 한 가지 정답과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특징도 이러한 시류에 함께 하고 잇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 들여 소위 말하는 '욜로적인 라이프'를 실현하는 데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피드백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누구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우리의 삶이 그렇게나 단순하게 카테고리화될 수 있는 것일까. 내 마음 안의 나도 너무나 다양해서 어떻게 갈래를 쳐야할 지 모를 때가 많은 이 상황에서, 획일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그의 대척점에 있는 듯한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팟캐스트와 15분의 신선한 편성의 그의 방송이 대세로 자리하고 있다.

사실 요즘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푹 빠져 있는 프로그램이고 컨텐츠이다.


어떻게 보면 김생민이야 말로 내가 생각하는 욜로의 전형인 것 같다.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관점을 따라 정말 한 평생 정성스럽고 올곧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삶의 소중함을 알고 그 안의 노동의 가치를 절실히 알아서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


"이렇게 양 극단의 두 시류를 보다가 나는 어느 순간 꽤 서글퍼지기 시작했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 가는 2, 30대의 사람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신기하게도 극단에 치우친 양쪽이 있을 뿐, 중간이 없다." 


다시 말해 보자면, 예전의 부모님의 세대처럼 퇴직 전 3, 40년 정도 한 직장에서의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거나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서 높은 금리 등으로 개인의 발전 역시 꿈꾸고 기대할 수 있던 시기와 달리, 지금의 젊은 세대는 직장을 포함하여 당장 눈 앞의 무엇 하나도 확신할 수 없는 좌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들어야 하는 기대감이 적절히 버무러진 이 시기를 지나 가고 있다. 나는 마치 이 다른 두 가지 트렌드가 젊은 청년들의 마음과 현실적 상황이 중간값을 지니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내일이 없는 듯이 즐기고 소비하는 쪽, 아니면 극도로 절약하고 10년, 20년 후를 생각하면서 저축하고 긴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쪽으로 선택하게 되는 우리의 상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어떤 것이 더 옳고 바람직하다는 정답은 처음부터 없다.

하지만 무언가 우리가 사는 이 시기의 이 세상이 조금 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 보는 계기가 되었달까.

거창한 듯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던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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