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 것인가? 채울 것인가?
학교 프로젝트로 country garden이 있었습니다. 런던 교외 Dorset에 위치한 신규 주택으로 메인 정원만 약 천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이었죠. 이 프로젝트로 공간을 채우는 디자인 접근 방식이 저와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요.
저는 주로 농경지가 펼쳐진 주변과 어우러지면서 전원적 특징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자연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하는데 중점을 두려고 했습니다. '초원(meadow)'같은 느낌의 시원시원한 공간과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의도적인 경사 같은 것으로 말이죠. 반면에 다른 친구들은 그 넓은 공간을 여러 개의 작은 공간으로 구획을 나누거나,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공간을 채워나갔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 공간들이 뷰를 방해하거나 답답해 보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딱히 그런 지적을 하는 tutor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간중간에 나무를 랜덤 하게 두어 그늘이나 다양성을 주는 것도 고려해보라는 피드백을 받은 건 저였죠.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단순하지만 몸으로 체감한 문화적 배경의 차이였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글로벌화되고 많은 현대적 건물과 조경에 우리 눈이 익숙해져있다고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뿌리 깊이 자리 잡은 문화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바로 이 마당의 비움에 익숙한 한국인이었던 거죠.
이 비움의 아름다움은 선불교에서 정점을 찍고 사상, 그림, 시, 차 문화 등에 영향을 미쳤는데 정원에서는 단연 일본의 '마른 산수(dry landscape)'에서 그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선불교를 내재성의 종교로 만드는 '일상의 정신'을 표현합니다. 선불교의 무 혹은 비어있음은 신적인 저기를 향하지 않습니다...(생략) 그런 세계상에는 지배하는 중앙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중심이 도처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자 모두가 중심을 이룹니다.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 친절한 중심인 그런 존재자에는 전체가 비칩니다. ('선불교의 철학' 中에서, 한병철 교수)
선불교의 '비어있음'은 실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경계는 사라지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즉, 공간을 비워둠으로 해서 주변의 수목이 정원 안으로 들어와 스며드는 관계 말이죠. 그것은 여백과 사물의 경계가 모호한 산수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서양의 정원은 아니 서양의 미학은 '형태(form)'가 항상 그 중심에 있습니다.
서양 정원의 모태와 같은 이슬람 정원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정원 (Generalife)의 구성도를 보면 공간 가득히 기하학적 도형들과 균형감을 이루는 대칭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원의 형태가 스페인 - 이탈리아 - 프랑스를 거쳐 더욱 섬세하게 진화한 형태로 영국까지 건너왔죠.
그들은 '비움'과는 정 반대 선상에 있는 '형태'의 완벽한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찾았습니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조화로움을요. 그것은 죽음과 생명의 경계가 모호한 동양의 '무(無)'와는 다른, 영원한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현실 세계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미메시스(mimesis)'에서 비롯됩니다.
잠깐 다시 저희 학교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저는 Victoria라는 저희 학교 학생의 아래 디자인이 특히 강한 인상으로 남았어요.
저는 이 모형이 그들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으나 현대적인 감각과 개인적 스타일이 잘 조합되어 진화된 디자인으로 보였어요. 전형적인 대칭이 아니면서도 질서와 균형감이 보이고, 여기에 더하여 물은 자유로운 곡선 안에 담아 운동감이 느껴지는.... 물론, 학생의 작품입니다만, 저는 가장 마음에 들었고 저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즉, 문화와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 의해 계속 진화한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죠.
저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정원이 아닌 우리나라 거실 구조에서도 발견합니다.
한국형 거실은 좌식 생활 패턴과 다목적 공간에 대한 니즈가 결합되어 나온 다소 획일적인 인테리어이기는 합니다만,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굳이 이 스타일을 바꾸려는 시도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간혹, 거실의 TV를 없애고 중앙에 6인용 테이블을 놓고 서재를 꾸미는 경우를 잡지에서 보긴 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이 빈 공간을 굳이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낄 만큼 너무나 익숙한 공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70-80년대 이후 주거 방식이 아파트로 대거 이동하면서 우리의 공간을 획일화시켰고 또 개인적 공간에 대해 특별히 '발전'시켜야 할 니즈를 못 느꼈을 수 있습니다. 요새 들어 셀프 인테리어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고 보지만 그 '개성'이 '카피'에 머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가능성을 봅니다. 지금과 같이 '취향'을 가지는 것이 트렌드세터로 여겨지고, '라이프 스타일'과 '공간'에 관한 주제가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기가 어쩌면 '우리의 정원'을 이야기 하기 가장 완벽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지난 글에 언급한 '벽' 안에 감춰진 우리의 세계를 가꾸는 일이며, 우리의 감성적, 이상적 '취향'을 현실 세계에 '미메시스'로 '재현'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의 비움'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의 미학적 사고를 오늘날 우리의 삶과 부합하는 공간의 새로운 조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의 소환'입니다.
혹시, 어릴 적 TV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을 기억하나요?
주인공 폴과 그의 친구들이 대마왕으로부터 니나를 구하기 위해 4차원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그 4차원의 세계는 아래 '찌찌'라는 인형이 요술봉으로 벽이나 땅을 치면 나타나는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 항상 이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모두가 이 문 안으로 뛰어들 때가 가장 흥미진진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하는 기대감이 최고치를 찍는 그 짧은 몇 초의 순간이 말이죠.
저는 여러분의 세계가 또는 저의 세계가 이 '벽' 안에 펼쳐지는 4차원의 세계와 같다고 봅니다. 그 세계를 어떤 '취향'으로 채울지...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겠지요. 저는 그 선택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