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일찍 퇴근한 날이다. 아이가 하교했을 텐데, 집이 조용하고 싸한 느낌까지 든다. 어디있나 살펴보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래, 피곤했겠지. 사춘기라 크려나보다. 생각을 하다가도 하교 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가 시간을 짜임새 쓰지 못한 모습을 보니 순간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여러개 였지만 꾹꾹 눌러두고, 내 입을 통해서 나간 한마디는
“피곤하니? 조금 쉬면 나아질거야.”
휴, 잘했다. 그래. 습관은 어려운거지. 아이가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이 어떤거 있는지 좀 더 알려주자. 루틴을 잡아보자. 학습해야 할 부분을 점검해보자. 등등 아이가 시간관리를 잘할 수 있도록 어떻게 훈육할지 속으로 되내었다.
스르륵, 바스락바스락. 아이가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난다.
“엄마 왔어?”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톡하면 터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엄마를 부른다. 자기도 이내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주섬주섬 내려오더니 국어독해집을 꺼낸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자기할일을 해놓고 쉬려는 마음이 전해졌다. 내안에 꾹꾹 담아둔 말을 들은 것 같아 순간 얼굴이 발개졌다. 그래, 스스로 잘하고 있었는데, 순간 걱정과 불안에 주파수가 맞춰지며 안 좋은 상황이 떠올랐고, 항상 이런거 아니냐는 염려의 목소리를 들킬 뻔 했다.
상황도 모른채 아이에게 모진말을 할 뻔했다. 할 일을 마친 아이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건네온다. 학교에서 안좋은 일이 있어서, 불편한 마음에 잠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서 그랬구나, 정말 다행이다. 그말들 내 뱉지 않았아서. 안도의 한숨을 몰래 쉬고 있을때, 아이는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엄마,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이번에도 같은 조 하기 싫었는데, 걔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내 의견은 무시해. A랑 B는 둘이 모이면 말 빨을 당해낼 수가 없어. 내가 제안한 활동이 어려울 수도 있지. 그런데 처음부터 잘하는 게 어딨어. 하다보면 잘해지는거잖아. 분명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까, 이런거 하는거 의미없다고 내 의견을 완전 묵살해 버리더라고. 결국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거였어. 이번에 또 당했어.수행평가라서 난 잘하고 싶었는데.”
그 친구는 자기주장이 쎈 아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이기적이라고 아이 친구들에게 전해들었었다.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하고 타인의 의견을 들어주고 의견 조율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오늘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네 의견이 존중받지 못 했어서, 많이 속상했겠다. 우리 딸 서운했겠네.”
“걔네들과 얘기하다보면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려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취급을 한다니까.”
내안에서 뜨거운 용암이 끓는 듯했다. 내 소중한 아이를 무시하다니. 아이가 학교에서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고통이 전해졌다. 그 친구를 비난하고 싶고, 옳은 얘기를 하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순간 그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학교생활에서, 관계를 맺고, 과제를 수행하는 법을 아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선수가 경기를 잘하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행동했어?”
“아무말도 못했어. 그냥 얼어버렸지. 쉬는 시간이 화장실로 가서 엉엉 울었어.”
“에고고, 많이 억울했구나. 얼마나 속상했을까.”
“응,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너무 답답하고, 정말 이런말 하기 싫은데, 엄마 미안해. 죽여버리고 싶었어.”
아이의 입에서 이정도의 얘기가 나왔다. 정말 힘들었나보다. 우리아이가 이 상황에서 배워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다음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게 중요하다. 속상한 내 감정은 잠시 넣어두고, 차분하게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뭐였어?”
“이 활동이 어려워보여도, 하다보면 잘하게 될거야. 처음은 어려울 수 있지만, 그리고 수행평가에서 이걸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해보지 그랬어~”
“엄마, 걔네 앞에 가면 말이 안나와! 그리고 듣지도 않고, 고구마 백만개라니까!!!”
“그렇구나, 듣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랬겠다. 음... 엄마 생각엔, 그 친구도 자기 상황을 말로 표현하는 것, 상대의 의견을 듣고 자기 의견과 조율하는 법을 모르 것 같아. 그래도 그 영역을 네가 알려줄 수는 없을 거야. 아직 그 친구는 뭐가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할 거거든. 우리딸이 그 상황이 다시 온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엄마 말을 듣고 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고구마 백만개였었어도, 내 의견을 표현했어서 억울하진 않았을 거 같아.”
대문자 I형인 딸은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주저하는 시간동안 하고 싶은 말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 같은데, 이번 일을 통해서 아이가 조금 알아차린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 아이 하교 시간에 조심스레 문자를 보내보았다.
아이는 경쾌하게 조편성을 바꿀 수 있었다며, 몹시 신나했다. 이제 그 상황을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선생님은 다른아이들의 의견도 들어보시고, 조율해주셨다고 한다.
“엄마, 정말 고마워. 내 맘속에 얘기를 하고 나니까 정말 후련하고, 내가 편안하고 원하는 대로 되어서 넘 신나.”
“어떻게 용기가 생겼어?”
“엄마의 코칭 덕분에, 그리고 마법의 물약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아이는 방법을 몰라 일방적으로 원치 않는 상황에 굴복해왔다면,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표현하고, 의견에 수용되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음을 배운 듯 하다. 의견을 조율하는 방법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