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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Sep 15. 2018

신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 '신촌'을 둘러보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컨퍼런스 하나를 들렀다가 옆에 있던 기획전시실을 찾았다.

 무슨 전시가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들어섰는데, <88 올림픽과 서울>이라는 전시와 <청년문화의 개척지, 신촌>이라는 두 가지 전시가 있었다.


 솔직히 '신촌'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나에게 오묘한 두 가지 감정이 찾아왔다.

가슴이 뛰는 듯한 느낌과 전시조차 덮어두고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신촌에서 취준생 생활을 보냈다.

 솔직히 취준생, 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내 운이 좋았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원하던 일을 할 수 있었고, 신촌에서 본격적으로 머무른 시간은 오히려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열망에 갈고닦던 대학교 4학년 무렵, 내적으로 불안하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데,  미래는 준비되지 않던 그 시간들.

나는 더 큰 세상을 만나고 싶은데, 큰 세상은 호락호락 문을 열어주지 않던 그 시간들.


막상 뚜껑 까 보니 별 것 없었던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쉬움과 기대감을 오가며 정신없이 걸어 다니던 곳이 신촌이었다.

신촌은 내게 상처와 고민과 설렘으로 범벅된 복잡한 곳이다.

수많은 스터디를 하고, 도서관을 오가며 신문을 들여다보고,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데 조모임은 왜 이렇게 카페로 잡는지,


빈 속에 아메리카노의 쓴 맛을 여실히 깨달았던 그때.




 잊고 지내던 시간들이 해일처럼 덮쳐왔고,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전시장으로 흘러들어왔다.



관심 있게 본 것이 있다면, 전시 초반부에 보이는 백자 영빈 이씨 명기 정도랄까.

연세대 터의 옛 유물들에 대해 학생 시절부터 큰 관심이 있던 터였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우리에게는 사도세자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이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었는데 1970년 옮기게 되었고, 그때 출토된 유물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신촌을 설명하는 핵심은 청년문화의 개척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시대별 설명을 하고는 있으나, 주로 청년들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이번 전시에서 연세대나 이화여대 등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누군가에게는 무척 재미있고

누군가에게는 별 관심 없는 내용이 될 것이다.


나에겐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때 입학 책자 등에 들어가는 연고전 관련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다. 그때 말고는 연고전에 간 적이 없다. 당시 스튜디오에서도 연세대 관련 촬영을 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 나는 패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스무 살의 내가 가진 옷이 별로 없었다. 나름대로 깨끗하게 입고 간다고 입고 갔는데, 가서 보니 모델이 된 다른 학생들에 비해 참 초라했다.

 나중에 보니 내 독사진이 포스터에 나왔는데 낡은 운동화의 노란 무늬가 깨끗하게 연세의 파란색으로 칠해져 수정되어 나온 것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있다. 그 포스터마저도 어떤 행사에 한 번 쓰이고 사라진 듯하다.


 연고전이나 대동제와 관련한 추억은 신촌에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늘 고뇌에 차있었다. 오히려 원주캠퍼스에서 아카라카를 온누리에를 할 때 진행을 한 기억이 있다. 무대에서 바라본 파란 물결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독수리다방을 꽤나 다녔음에도, 오래되었다는 것만 알았지

기형도의 단골집인 줄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알았다.


기형도는 내게 특별한 시인이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 무렵, 열여섯 일 때인지 열일곱 때인지 처음으로 필사 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후 예술고 문예창작과 재학기간 내내 나는 수없이 많은 필사를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 기형도는 내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막힐 때마다 다시금 꺼내 들어 필사를 반복하는 시인이다.


오죽하면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두 번이나 샀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축제, 패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회 변혁운동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들이 전시장을 따라 펼쳐진다.


4.19 혁명 이후 신촌은 권력에 맞서는 대학생들의 중심지로 기능한다. 영화 1987에서도 나왔지만, 6월 항쟁이 전국민적 저항으로 확대된 데에는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전시의 막바지에는 신촌에 자리한 스타트업 소개가 있다.

아마도 오늘날까지의 모습을 담겠다는 의도 일터다.




하지만 솔직히 신선한 전시는 아니었다. 이런 전시들은 보통 증빙자료를 늘어놓듯 전시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은 깊이 통감한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었다면, 내 개인적인 감상에 대한 것 일터다.


이번 전시는 잊고 지냈던 신촌에 대한 내 기억을 되돌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서 밝혔듯 신촌에 대한 기억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시장을 나서며 이제 그 기억들이 청춘의 기억으로, 어느새 유물이 된 이대 앞의 당대 최신 양장처럼 조금은 아련함이 몰려온다.


 열망도 크고 열정도 크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던 시기.
 사회의 매뉴얼대로 잘 해내고 있었지만
매뉴얼엔 없던 불안으로 점철된 시기.



 나는 그 시절 신촌의 이방인이었다.


꿈을 찾아 대양으로 나왔으나 늘 위태로운 파도에 흔들렸다.

그 기억을 꺼내어 다시 쓰다듬어 보게 했으니,

어쩌면 학예사는 이번 전시를 성공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촌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10월 21일까지 한다고 하니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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