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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Sep 14. 2018

부부의 서재를 만들다

독서에 관한 낭만적 전통을 만들기, 그 시작

 신혼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을 때,

그 첫날 남편은 종이뭉치 하나를 건넸다.


"아내가 생긴다면 꼭 보여주고 싶은 글이 있었어."



쑥스럽게 건넨 종이뭉치에는 '스님의 주례사'가 적혀있었다.

군대에서 얼렁뚱땅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 알지,

불교에 관심이 있을 줄은? 그나저나 주례사라니?

얼떨결에 받아 든 글은 알고 보니 이미 책으로도 유명한 법륜스님의 말씀이었다.


오래전부터 품어왔다는 그 글에서 남편의 낭만이 묻어났다.

그 글 덕분인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신혼을 만끽하고 있다.


나는 장난스레 재미난 부분을 밑줄 쳐보다가 우리 집 냉장고에 그 글을 붙여두었다.

이따금씩 밑줄은 늘어났다.

냉장고 앞을 서성이다 이젠 외우겠다 싶으면 

여러 장인지라 다른 페이지를 넘겨 붙여두기도 했다.



모든 구절이 인상깊었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쏙 와닿은 것은 

덕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배려하고 베푸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부분이다. 

결혼에는 종종 계산적인 상황들이 생기곤 한다. 그러나 손해를 봤다는 생각도, 반대로 덕을 보겠다는 생각도 관계를 해치는 원인이 될 뿐이다.

이 글을 오랫동안 품어온 남편이 무척이나 현명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존경스러웠다.

이 글을 함께 읽으며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그의 아내가 된 일이 뿌듯했다.


그리고 문득.

우리는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가풍, 하나의 전통을 만들자 결심했다.

그건 바로 책으로 대화하기.


스님의 주례사를 시작으로, 우리는 각자가 인상 깊었던 책들과 같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자유롭게 상대가 눈여겨봤으면 하는 부분을 밑줄 치고 메모했다. 타인을 위해 나의 흔적을 남기고, 나를 염두에 둔 타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우리 손자 손녀들도 이 지적인 필담을 즐기게 되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며,작은 설렘으로 우리의 책을 채워나가는 멋진 일들, 이 방을 서성이는 매일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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