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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Dec 25. 2018

애도, 떠난 이를 잊는 시작인가요?

애도,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 (1) 프로이트

 '애도'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떠올릴 때, 우리는 누군가를 추모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사전적으로도 그렇다. 정신분석 용어 사전에서 바라보는 애도는 '의미 있는 애정 대상을 상실한 후에 따라오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 과정'이다. 애도는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 번은 겪게 되는 일이며, 누군가에게는 끝나지 않을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애도는 산 자를 위한 시간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나서, 

 그가 없는 세계를 살아갈 용기를 내는 시간인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애도의 여정에 앞서 애도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생각들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고전적인 애도 연구는 프로이트와 데리다를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으로 더 잘 알려진 정신분석학자이고, 데리다는 해체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학자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바로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이다. 데리다의 애도 이론 역시 프로이트를 기반으로 나온 것이기에 프로이트를 통해 시작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2차 대전 당시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기리는 담벼락



 우선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애도와 우울증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그의 『애도와 우울증』을 살펴보면, 


프로이트의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사랑하는’이라는 전제다. 가령 우리가 알지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다른 나라의 어떤 이가 고령으로 자연사를 맞이했다면, 우리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조차 들을 수 없겠지만, 혹 알게 된다 해도 ‘나의 상실’로서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고, 그는 내 애정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정의 대상을 잃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애도’를 하게 된다. 애정의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왜 반응을 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내가 애정 하는 대상의 상실을, 머나먼 타국의 알지 못하는 타자의 죽음처럼 그저 인간의 숙명으로서 지나가는 일이라고 덤덤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가 말하는 애정의 대상이란, 그러니까 일종의 정신적 에너지를 부여했던 대상이다. 누군가에게 쏟은 정신적 에너지는 친밀감, 애정과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리비도를 부여했던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 그 자리에 남은 리비도를 마주하게 된다. 갈 곳을 잃은 리비도의 방황 시간이 애도 기간이라면, 그다음 단계는 리비도가 다시 새로운 대상을 찾아 부착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일반적으로 상실 이후 리비도는 다른 대상으로 이행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기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종내는 새로운 대상에게 다시 애정을 부여하며 슬픔과 상실감은 회복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상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울증은 애도나 슬픔과 닮아있다. 다만 프로이트가 꼽는 한 가지 예외, 그것은 ‘자애심의 추락’이다. 슬픔은 설명되지만, 우울증은 점점 자아로 파고들어 자아의 빈곤함을 부추긴다. 리비도가 다른 대상으로 미처 이동되지 못하고 자아 속으로 귀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왜 생기는 걸까?


 프로이트는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로 ‘상실의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를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애도의 중요성은 커진다.


 애도는 무엇을 상실했는지 이해하고 있는 행동이며, 우리의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고 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발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상실의 충격 속에서 뒤늦게 이루어진 리비도의 생성이든 아니든,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정상적인 리비도 이행이 실제로 이루어지느냐의 문제다. 누군가를 잃는 일 가슴 깊이 남아 계속해서 슬픔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새로운 애정의 대상을 발견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상실 초기에 느꼈던 충격보다는 완화되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상실은 상실이다.



 프로이트 역시  리비도 이행이 명쾌한 이론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던 듯하다. 애도의 과정이 모두 지나가고 난 후에 대해 다소 애매한 의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지나간 이후 그 자리에 남는 것, ‘승리의 순간을 위해 그 나름의 경제적 조건을 조성하는 조짐이 없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다시 말하면 성취감이나 어떤 경제적 원칙이 뒤따르는지 말이다.


 그는 추측한다. “그와 같은 단절 작업이 너무 느리게,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단절에 필요한 에너지 또한 모두 소진되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애도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정신적 에너지과 방황을 겪는 시기일 뿐일까. 우리는 그렇게 다른 대상을 찾으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에너지를 거둬들일 수 있을까.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 잃어본 이들이라면 선뜻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끝나지 않을 애도의 여정이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든다. 

애도는 타인을 잊는 여정이 아니라, 기억하는 여정이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애도 이론,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한 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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