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학자P Dec 26. 2018

아니요, 애도는 기억의 여정이죠.

애도,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 (2) 자크 데리다

 앞의 글에서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살펴보았다. 프로이트에게 애도란, 애정 했던 대상에게 부여했던 일종의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를 거둬들여 또 다른 대상을 찾아가는, 회복을 위해 상실한 대상을 잊는 여정이었다.   

  

 이번에 만날 애도에 대한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불가능한 애도’다.

 데리다는 프로이트처럼 실증적 연구를 위한 애도 이론을 펼쳤다기보다 그의 동료들, 철학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발표한 글들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오랜 시간 관심을 가졌고, 이를 활용해 다양한 글들을 발표했다. 대화적 관계로서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생각으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자, 이제 데리다의 생각을 알아보자.     




 데리다는 타자의 기억을 마음속에 내재시키는, ‘애도 작업’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는 그런 행위를 타자에 대한 배신행위로 보았는데, 기억의 내면화가 타자성을 말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기억을 내면화하는 일이 어떻게 타자성의 말살과 배반의 모습인가?


 애정 하는 대상의 상실 속에서 우리는 남겨진 기억을 자기화하는 단계를 지나게 된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와 나 사이에 남겨진 좋은 기억을 곱씹는다. 타자의 이미지나 그의 이상은 곱씹어지면서 우리의 일부로 내재하게 된다. 타자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지만, 그곳엔 타자가 없다. 마침내 타자의 기억을 나의 것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다. 데리다는 이런 과정들이 타자를 삼키고, 타자성을 말살한다고 표현했다. 기억은 미화될 소지가 있고, 그 기억은 타자의 기억이 아니라 재생성된 나의 기억인 것이다.      




 데리다의 ‘불가능한 애도’란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타자를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와의 무한한 거리를 존중하며, 내 안에 각색한 기억을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타자를 거부하고 타자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와 무한한 거리를 둔다는 것, 그러나 애정의 대상이었던 상실된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인가?     


 데리다는 “부드러운 거부”라는 말을 통해 이 지점을 설명한다. 부드럽게 거부한다는 것은 어감이 전해주듯 절대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부는 거부다. 상실한 애정의 대상은 더 이상 내 안에 자리 잡아 나의 일부가 될 수 없지만, 그가 내면에서 여전히 타자성을 유지하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애도를 필요한 일이라고 보고 있는 것일까?


 애도가 불가능하고, 타자를 부드럽게 거부해야 한다면 애도라는 것은 존재 가능한 일인지, 필요한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데리다가 행한 애도 모습으로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데리다는 죽은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동료들을 애도한 데리다의 글에서 그의 애도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Memoires for Paul de Man>이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없는 것으로 안다. 여기서는 <아듀 레비나스>에 실린 글을 가져와본다. (자크 데리다, <아듀 레비나스>, 문성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6)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는 레비나스가 아듀에 대해 우리에게 털어놓은 것을 상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그에게 “아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듯 그를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의 성 아닌 이름을 부르면서 말입니다. 이 순간, 그가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그가 우리에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러나 우리에 앞선 우리에게, 우리 앞에서 응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면서, 우리에게 “아-듀”를 일깨우면서. 아듀, 에마뉘엘.”(p.37)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떠나보낼 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레비나스와의 인사를 기다린다. 오지 않을 그의 응답은 이미 그가 ‘앞선 우리에게’, ‘우리 앞에서’ 응답한 것이 된다. 레비나스에 관한 이 글들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떠나보내며 1995년 12월 27일 판탱 묘지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글의 일부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부끄러움 때문에 내보낼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개인적인 속내를 털어놓거나 내보이지 않고’ 이야기하겠다는 부분이다. 오히려 그를 이야기하기 위해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말, 즉 죽은 타인의 언어를 불러온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공유하며 느끼는 이 전례 없는 감정, 부끄러움 때문에 내보일 수 없는 이 감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개인적인 속내를 털어놓거나 내보이지 않고 이 독특한 감정이 맡겨진 책임, 유산으로서 맡겨진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 다시 레비나스의 말을 빌려오는 것을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23p.)     


“레비나스에 의해, 레비나스 덕택에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 일어난 것을,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그로부터 맡겨진 책임으로서 받아들일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지요. 우리는 또한 그것을 가벼워지고 무고해진 빚으로 레비나스에게 되갚을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35p.)          


 이 글의 전문 곳곳은 레비나스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를 자기 생각으로 사유화하지 않고 레비나스의 언어를 이용해 레비나스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 대화는 상실한 이의 언어를 사용해 이루어진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그의 언어로 그를 존중하며 이루어진다. 

 특히나 데리다의 애도 이론은 레비나스의 영향을 받았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에 대한 ‘맡겨진 책임’은 데리다에게 와서 살아 있는 자에게 ‘맡겨진 애도’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잃고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상처가 나면 아물었다 할지라도 흉이 남는다. 

깊이 패인 상처일수록 그렇다. 사랑하는 타자의 죽음은 피부 위의 상처보다 깊은 상처다. 



그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 회복이 아니라,

 그 흉터가 생긴 몸, 그 영원한 변화를 안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남겨진 자들이 멈춘 걸음을 다시 떼는 것.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이후 ‘남겨진 자’가 된 이상, 과거 원상태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복원의 의미보다는 상실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영구적 변화를 인정할 때 오히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한 회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기억의 내면화를 경계한 데리다의 불가능한 애도에 배반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기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실 그 자체에 대한 받아들임이다. 따라서 데리다 식의 ‘부드러운 거부’는 유효하다.


 상실의 받아들임이라는 방향을 향하게 되는 변화의 측면에서,

그렇게 그를 그로서 기억하며 '불가능한 애도'에 발을 들여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도, 떠난 이를 잊는 시작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