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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Dec 28. 2018

실존주의에서 바라본 타인과 죽음

타인과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시선 (1)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외부에서 주어진 죽음 혹은 자연사나 자살 등 어떤 이유에서라도 타인의 죽음은 많은 생각을 남긴다. 타인의 죽음 이후에 남겨지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앞선 누군가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설명을 남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은 언제 어떤 이유로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불안과 실존적 질문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부터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레비나스를 통해 죽음과 타자에 대한 시각차를 알아보며 타인의 죽음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번 글은 우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살펴보자.          



하이데거


 먼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실존이 지닌 문제들에 치밀하고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다. 물론 두 사람의 논의는 주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타인에 대한 시각이 주변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타인에 대한 시각의 시발점으로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죽음에 관한 시각부터 살펴보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예견되는 죽음이 현존재의 끝이자 완성이라고 보았다.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도 했다. 그는 가장 확실한 가능성으로서 죽음을 바라보았다.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망’이라고 표현되는, 죽음을 이해하는 현존재, 인간의 죽음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자신의 죽음은 살아있는 존재를 불안하게 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현존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았다. 존재를 직면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감정인 것이다. 많은 불안이 있을 수 있지만, 존재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근본적인 불안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사는 삶은 시간을 죽이는 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실존을 유일한 답으로 제시하는데, 고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건 불안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니라 언제든 다가올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다. 

   


 하이데거의 타인에 대한 시각은 어떨까?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다양한 존재자들과 현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현존재가 각자성을 지녔다고 보았는데, 각각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졌다는 의미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다. 인간은 각자성을 지닌 존재하는 것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아간다. 하이데거가 뜻하는 사람들의 존재 방식은 함께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세계 속에 살아간다. 서로가 타인이 되어 세계 안에 함께한다.


 하이데거는 ‘공동 존재’를 이야기했다. 거기엔 타인의 참여가 있으나, 내가 먼저 존재하고 타인이 뒤따르는 일이 아니다. 즉, 단순히 나의 영역에 타인이 조연으로 출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타인 역시 각자의 삶을 가지고 이 곳 세계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난 타자에 대한 관심은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그러나 주체와 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포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인의 존재는 주체와의 교류와 영향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은 물론, 주체에 비해 주변적일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 계열의 실존주의 철학자지만, 죽음에 관해 조금은 다른 해석을 둔다. 앞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앞서 달려 나가 보라고 할 정도로 일직선상에 두고 삶을 관찰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하이데거가 삶의 종결로 보는 죽음에 대해 반발한다. 그는 죽음을 현존재의 바깥에 두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언제 있을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죽음이
“존재하는 나에 대한 관점에 대해 타자의 관점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타자에 의해 죽은 이의 삶이 재구성되거나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죽음에 대해 나는 기억하거나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타자의 문제에 있어서의 시각차는 어떨까? 


하이데거가 공동 존재를 언급하였듯, 사르트르 역시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타자의 문제에 있어서 사르트르가 관심 가지는 것은 타인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 방식이다. 어쩌면 타자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알 수 있는 존재, 우리의 생각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부딪히며 살아가는 타자의 존재는 결국 나와 동일한 존재일 수는 없다. 오히려 나의 경험 밖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타자의 존재는 시선이라는 방식을 통해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시선은 타자를 대상으로 앞에 세워두고 드러낸다. 그러나 타자의 드러냄이라는 것은 눈앞의 사물과는 다른 문제다. 사르트르가 시선에 부여하는 존재론적인 의미는 중요한 부분이다. 타자의 존재는 바라보는 나에 의해 규정되고 사유화될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바라보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보여짐을 당하는 입장에서 더욱 큰 시사점을 보여준다.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고 있다면, 나의 행위와 존재방식은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내가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사유화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타자의 시선은 나를 ‘타유화’할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특정한 순간에만 시선을 주고받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사유화하고 타유화한다. 즉, 관계한다. 



 앞서 우리에게 존재와 죽음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전해주는 하이데거는 단순히 말해서 존재를 고립적인 자아로 나타내고, 사르트르는 그보다는 사회적 자아를 보여주지만 역시 자유의 우선성 앞에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만큼 명쾌한 답이 되어주진 못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존재의 죽음, 다시 말하자면 ‘나’의 죽음에 대한 고민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면 우리는 이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가야 한다.      




  다음 편에서 살펴볼 이는 바로 내가 애정 하는 레비나스다. 

 그는 타인의 존재를 보다 적극적인 논의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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