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속 애도 읽기 (1) 광주비엔날레 여상희 작가의 <검은 대지>
어느새 작년,
광주 비엔날레를 다녀와서 몇 가지 작품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작품은 여상희 작가의 <검은 대지>다.
비석은 죽은 이의 이름, 이력 등을 나타낸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해주며, 죽은 이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이자, 누군가의 생이 요약되어 있는 집약체다. 흔적조차 없어진 누군가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비석뿐이다. 전시장 가운데 바닥에 누운 채로 늘어선 비석들의 집합은, 한때는 존재했었던 누군가를 세상의 언어로 요약한 것이다.
2018 광주 비엔날레 전시 작품으로 나온 여상희의 <검은 대지>는 사회적 죽음의 문제가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업이다. 만약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사라진 사회적 죽음의 희생자들을 그저 비석으로 나타내었다면, 일반적인 기념비의 맥락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일에서 사회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일만큼이나 개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앞서 지적했다. <검은 대지>는 바로 그러한 이중의 문제를 작품의 재료에서부터 다루었다.
<검은 대지>의 비석을 만드는 데에 여상희 작가가 선택한 재료는 신문지다.
신문지에 먹을 혼합해 제작했는데, 특이점은 일상 속 나뒹구는 신문지를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록이나 증언을 당대 신문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신문을 으깨어 제작한 것이다. 당시 신문들이 보도했던 사회적 죽음의 기록들은 이제 물에 불리고 으깨어져 비석으로 형상화됐다.
작품을 제작하는 일련의 작업은 마치 근현대사 속의 규명되지 못한 죽음들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불리고 으깨어진 이름은 애석하게도 사회적 문제와 함께 뒤섞여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잠들어 있다. 이 작품은 기록물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기록을 모아 으깬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덩어리를 가지고 작가는 다른 무엇도 아닌 비석을 만들어 넋을 위로한다. 산 자로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비석을 세우는 일이고, 산 자들에게 남길 수 있는 것도 비석이다. 그렇게 기록을 품었던 신문은 비석이 되어 죽은 이의 이름을 영원히 망실한 채 간직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현대사의 죽음은 그 누구의 기억도, 기록도 온전치 못했다. 어쩌면 제주도 4.3 평화공원의 백비처럼 저항하기 위해 누워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보다 자세한 부분을 살펴보자. <검은 대지>는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의 앞에 엄숙하게 펼쳐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석의 개별적인 모양은 저마다 다르다. 비석들의 높낮이도 다르고 질감과 색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만약 같은 모양의 비석들이었다면 유독 격변하며 굽이치던 한국 현대사 속의 이름 모를 무수한 죽음들이 획일적으로 또 한 번 묶이는 일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저마다 다른 비석이기에, 마치 저마다 다른 이의 이름을 마주한 것과 같은 인상이다.
전시된 비석들 사이로 관람객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샛길이 나있다. 관람객들은 주변에서 비석들을 바라보고, 이 길로 들어서 비석 사이에서 비석을 보게 된다. 하나의 작은 조명만이 비석들의 위를 외로이 비춘다. 관람객은 비석 사이를 거닐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간혹 뜯겨진 비석의 단면이 보인다. 그것이 원래 신문지였음을 보여주는 지저분한, 죽이 된 단면이 보인다. 사회적 죽음으로 사라진 이들의 사연은 그렇게 시간 속에 반죽이 되어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발굴되지 못한 죽음들은 그렇게 비석이 되어 누워있다. 어쩌면 비석을 세울 수 없었던 죽음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고, 이제는 알 수도 없는 죽음의 비석들 사이로 관람객은 기억을 남긴다.
익명의 당신이,
한때는 이름을 가졌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닿지 못한 이름을 가진 당신이
비석이 된 시간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사회 문제와 개인의 죽음이 맞물린 엄숙한 비석들의 광경에서 관람객은 ‘애도’를 생각한다. 비석을 바라보는 일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맞닿아있다. 비석은 저곳과 이곳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떠나보내는 추모의 글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대해 말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 없고 빚이 없는 죄의식입니다. 그것은 사실, 맡겨진 책임이지요. 죽음이 절대적 예외로 남아 있는 순간, 견줄 바 없는 감정의 순간 속에서 맡겨진 책임입니다.”
- 자크 데리다,『아듀 레비나스(Adieu A Emmanuel Levinas)』, 문성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6.
비석 앞에서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로서 ‘맡겨진 책임’을 느낀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의 애도에 관한 중요한 감정이다. 무수한 비석 위를 비추는 작고 외로운 조명의 불안한 불빛 아래서 관람객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여기 무수한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생전 조명되지 못했던 많은 죽음은 여전히 아슬아슬한 조명 아래에 한 가닥 진실의 빛줄기를 받고 있다. 그곳에 그 죽음이 ‘자리하고 있음’만이 우리가 짐작하는 유일한 사실이자 기억될 진실, 그리고 맡겨진 책임이다.
비석 혹은 기념비의 성공적인 애도는 무엇이고, 성공적인 애도는 가능한 일인가?
상실한 개인과 문제가 된 사회를 함축적인 기념비의 방식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드러냈을 때 나타나는 효과가 그 대답일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면 애도 가능성의 성공으로 봐야 한다. 다음의 비를 세우지 않기 위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과 무게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