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학자P Jan 10. 2019

기념하실 건가요, 기억하실 건가요?

기념비의 시대를 지나 기억물의 시대로

 기념비와 기억에 관한 사유는 나의 연구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주제다.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행위는 비를 세우는 일이다. 기념비는 과거에는 위대한 이들의 업적을 치하하는 일로 주로 쓰여 왔으나 현대에 들어서 역사와 피해자, 다수의 희생 등을 기리는 데에 많이 쓰이고 있다. 기념비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미적 맥락까지 아우르고 있는 중요한 시대적 반영물이다. 

 최근 기념비는 그 흐름이 크게 변하고 있다. 기념물에서 기억물로의 의미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용면에서도, 그 형식면에서도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로 되묻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6.25나 베트남 참전 등을 기념하는 동상은 과거에는 웅장하고 숭고한 느낌을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미적 감각이나 본래 의도대로 보는 이에게 충성심을 고취시킨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는 바깥 공원의 기념비보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와 같은 것들 속에서 당대의 기억을 만난다. 참전용사라는 집단적 이름하에 잊힌 희생된 인물의 개인적 이야기 역시 전쟁기념비보다 미디어가 더 큰 감흥을 주기도 한다. 특히나 희생자가 아닌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동상으로 치하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인 유물로 비치기도 한다. 


1. 전국 각지의 참전 기념비와 탑(출처는 본문 하단 표기)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 참전비를 비롯해 국내 다수의 전쟁 기념비는 규모와 양식이 단순하고 획일적인 모습이다. 참전군인의 용맹성에 집중하고 전통적 상징들을 주로 사용해 국가적 기념성을 나타냈다. 개인에 대한 기억이나 추모보다는 국가적 위엄과 위상을 나타내는데 더 주력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적 한계를 보여주는 곳이 많다.


 요즘 세계적 흐름에서 제작되는 기념비는 전체주의적이고 어떤 집단적 목표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모습, 즉 구시대적 산물로서의 모습을 점점 탈피하고 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설계는 물론 용맹성 뒤에 가려진 참전군인의 경험과 고통, 사회적 죽음이 품은 많은 사유들에 대한 고려가 다시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영의 역기념비 개념이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기념비들을 넘어선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과거 기념비에 저항하는 사례로서 ‘역기념비’는 반기념비, 혹은 비기념비, 탈기념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새로운 기념비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과거의 기념비적 전통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를 향해 새로운 기억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 의의가 있다. 웅장한 동상이나 희생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기념’비 대신, 기억에 무게를 둔다. 


한 마디로 기억비, 기억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국가적 이상과 승리를 나타내는 19세기의 전형적인 구상적 도상으로부터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국가의 양가성과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반영웅적이고 반어적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개념적인 설치로의 변형이다.”

- 제임스 E. 영, 정유경 외 역, 「기억/기념비」, 『꼭 읽어야 할 예술비평용어 31선』, 미진사, 2015.




 가장 유명한 역기념비의 사례는 요헨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가 함부르크에 세운 <평화를 위하고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기념비>다. 방문객들은 기념비에 서명을 할 수 있으며, 서명이 벽면에 채워지면 기념비가 시간에 따라 높이를 낮춰간다. 마침내는 사라지도록 설계하여 기존의 기념비 개념에 저항했다.


2. 평화를 위하고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기념비. 시간에 따라 달라진 모습들.



 한국의 사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제주도 4.3 평화공원에 있는 ‘백비’다. 백비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다. 기념비가 되었어야 하나, 기념할 수 없는 기억의 무게처럼 장엄한 크기의 흰 돌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누워있다. 비가 누워있는 공간의 천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고, 하늘로 뚫려있어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떨어지는 햇빛이 숙연하다. 기념비가 누워있는 바닥은 둥글게 제단을 했고, 얼굴이 비치는 검은색 매끄러운 돌바닥이다.


3. 제주 4.3 평화공원 백비. 직접 촬영.


 제주도 4.3 평화공원의 백비는 매듭지어진 기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역기념비 사례와 더불어 살펴볼만하다. 앞선 고찰에서 우리는 사회적 죽음은 해당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모두 살피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념비는 종결된 사건을 의미한다. 명명된 사건에 대한 기억의 증좌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은 그동안 묻혀왔고 제대로 명명되지 못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며, 아무도 마무리 짓지 못한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기념비를 세울 수 없었다. 백비는 아무것도 적히지 못한 채 누워있다. 


이름 지었어야 할 기념비는 명명될 수 없었고,
 세워졌어야 할 기념비는
누워있음으로써 기억과 망각에 저항한다. 


그러나 평화공원의 백비는 앞서 유럽식 역기념비, 새로이 고안된 대안적 형태라거나 어떤 해체주의의 맥락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가 가진 역사적 특수성의 맥락에서 이 비를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오랜 갈등인 이념의 문제로 빚어진 학살이 여전히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애도의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못한 그들의 죽음은 기억되고 기록되기를 거부한다. 정확한 규명 없이 진실에 이름 붙이지 않는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저항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떤 측면에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애도로 해석될 수 있는가? 

 명명된 죽음이란 마무리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것은 애도의 시작도, 끝도 알 수가 없다. 명명되지 못한 사건임을 천명함으로써 오히려 남아있는 이들은 명명되어야 할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해 ‘맡겨진 책임’으로 품고 살게 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제주 4.3 사건은 이름 붙이지 못한 일이라 기억되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언젠가는 마무리 지어야 할 애도의 책임감을 부여하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비석을 활용한 한 예술가의 작품을 살펴보자.




사진 출처)

1.  전국 각지의 참전 기념비와 탑

   노포동 <6·25 참전 용사 기념비>, 2003년 건립

   사진 출처: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전라북도 고창 <베트남 참전 기념비>, 2009년 건립

   사진 출처: 전북서부 보훈지청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현충탑>, 1995년 건립

   사진 출처: 군포시


2. 요헨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 게르츠가 함부르크에 세운 <평화를 위하고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기념비>

샬레브 게르츠의 사이트:  www.shalev-gerz.net


3. 제주도 백비 : 직접 촬영

매거진의 이전글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는 슬픔의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