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린 Jan 09. 2024

80만 원 쓴 파인다이닝은 어땠을까

싱가포르 미슐랭 스타 'Buona Terra'


 특별한 날,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파인 다이닝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화려한 파인 다이닝 코스들과 이제는 너무 평범해진 오마카세, 한우카세 등에 지나치게 노출된 탓(덕)이었을까. 미슐랭 식당이 유독 많은 것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파인 다이닝을 가보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주말 저녁 시간대를 예약해 뒀다.


레스토랑 'Buona Terra(부오나 테라)'는 오차드, 한국으로 따지면 압구정쯤 되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날은 유독 비가 계속 와서 우리 둘 다 우산을 쓰고도 많이 젖은 상태로 식당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느낀 건데, 차나 택시 없이는 가기 어려운 길과 위치에 있는 식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날 경험한 음식은 디저트까지 포함해 총 13가지 이상이었고 식당에는 약 6-7개의 테이블과 함께 별도의 단체석 룸이 있었다. 


와인 한 잔도 없이 2명에 80만 원을 지불한 식사가 어땠는지 정리해 보았다.


1. 크기는 작지만 아이디어는 대담하게


가장 처음에 나온 아뮤즈 부쉬 3개

일단 모든 음식들이 '다르게' 나와서 좋았다. 방울토마토는 알고 보니 버터 초콜릿을 입힌 토마토 주스였고, 면으로 보였던 파스타는 애호박이고 아이스크림 같았던 구슬 가루는 무를 갈아서 만든 소스이고. 이 외에도 셰프만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아이디어로 음식 하나를 엄청 관찰하고 음미할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이 즐거웠다.


바쁜 점심시간에 그냥 후루룩 넘기는 면이나 밥이랑은 다르게 내 식사 시간을 온전히 시각과 미각에 즐거움을 제공하는 예쁜 코스들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이 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듯했다. 정말 밥 안 먹는 아이들도 이런 정성으로 만들어주면 식사 시간만 찾을 것 같달까. 평소에 보던 식재료들이 이렇게나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2. 미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맛은 비슷하다

메인코스 중 고기요리만 모아둔 사진

나는 어릴 때부터 셰프들이 잔뜩 나오는 올리브(요리) 채널을 꼬박 챙겨봐서 거기서 나온 새로운 분자요리나 아티초크 같이 생소한 식재료, 평소 보지 못하는 오일 브랜드 등을 식당에서 보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웠다. 또 먹는 것이 아니라 '음미'를 하면서 생선 종류를 맞추고 오일 브랜드를 물어보고 하는 과정들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정말 뭔가를 더 배우면 세상이 선명하게 보인다더니,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아 이게 '알단테'구나", "화이트 트러플은 블랙이랑은 이렇게 좀 다르구나" 뭐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굳이 미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맛있다" "이건 좀 더 맛있고 달다" 이 정도로 평이 단순해진다. 맛있는 건 당연한 건데 막 '미친 듯이' '충격적으로' 맛있다고 느낄까는 의문이다. 남편과 나 둘 다 정말 대단한 음식이라 생각했고 정말 일상에서는 맛보지 못한 맛있는 맛이라고는 느꼈는데 뭔가 태어나서 처음 먹은 두리안이나 산 꼭대기에서 먹는 컵라면 정도의 충격적인 '미친 맛'은 못 느꼈다고 해야 하나.


3. 80만 원의 가치를 가진 분위기


궁금한 건 다 알려주는 좋은 직원들과 대화하기 편안한 분위기


나는 식전빵에서부터 모든 식당의 수준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정말 맛있었던 싱가포르의 어떤 프랑스 식당은 빵이 너무너무 맛있어서 같이 간 모두가 3-4번을 리필할 정도였는데, 메인 디쉬 역시 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또 마리나 베이 근처에 있는 고든 램지 식당은 생각보다 식전 빵이 정말 마르고 오일도 별로였는데 메인 음식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이 생각난다. (*참고로 두바이에 있던 고든 램지 식당은 괜찮았다.)


이날 부오나 테라 식당의 식전빵은 4종류였는데 모두 식감도 색도 모양도 달라서 좋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함께 나오는 올리브 오일이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진하고 강한 풍미를 갖고 있어서 직원에게 물어봐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오일 가격이 의외로 저렴하고 구하기도 쉬워서 더욱 좋았다. 평범한 재료로 좋은 맛을 내는 식당이 더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좋은 분위기도 한몫했다. 대화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직원의 코스 설명이나 서빙 속도도 좋았고 모든 테이블이 '우리가 구석이야, 제일 편해'라고 말하는 듯한 배치도. 그리고 모두가 약속한 듯 요란하지 않게 즐기는 시간들이 모두 조화로웠다. 비록 우리 뒤에 앉아 있던 한 중국인 커플이 플래시를 비춰가며 백송이 장미꽃과 함께 엄청난 양의 인스타용 사진을 1시간 내내 찍긴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우리에게 대화의 소재를 주어 나름 재밌었다. 

 


4. 디저트까지 코스로 즐기는 빈틈없는 순서


디저트 역시 다른 맛과 식감으로 총 5종 정도가 제공되는데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츄파춥스 모양의 초콜릿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른 테이블에 노부부 4명이 앉아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사탕을 마지막으로 물고 있는 걸 보니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예상이 가는 디저트는 살구맛 젤리 외에는 하나도 없었다. 시원한 커스터드 구슬 아이스크림을 열어보니 딸기 퓌레가 나오고 그 옆에는 바질 오일이 감싸고 있는 등 굉장히 예상을 빗나가는 재미있는 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와인 없이도 80만 원이 나오는데 또 갈 것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 돈으로 가까운 곳 여행지를 가거나 아마 다른 미슐랭 식당을 또 경험해 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날 깜빡하고 놓고 온 우산을 다시 가지러 간다면 모를까. 남편과 나 둘 다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매번 하는 말이 "맞아, 진짜 맛있었지. 한 번 경험해서 좋았다~"였기 때문에!

작가의 이전글 커피계의 에르메스? 진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