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할머니가 50리를 걸어 우리 집으로오셨다. 말린 고추 보따리를 배낭에 메고 5시간을 걸어서 오셨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60대 중 후반으로 기억한다. 마흔살이 된 당신의 아들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비를 마련하는데 보탬이 되라고, 당신이 하실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오셨다.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인가 부다. 마흔 살이 넘어 이미 다른 가족을 꾸려도, 할머니에게 아들은 그냥 자신의 아들이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휴대폰도, 집 전화기도 없는 동네에서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아버지가 쓰러진지 며칠만에 할머니가 오셨다. 의식도 없이 쓰러져 있는 자신의 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OO엄마, 이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약 사는데 보태게” 라며 고추 보따리를 내려 놓던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한참 아들을 바라보다 다시 집으로 올라 간다던 할머니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장장 50리, 5시간을 걸어 와, 다시 5시간을 걸어서 올라간다던 할머니를 겨우 말렸다. 자고 다음날 일찍 떠나시라고. 그 가을 늦은 밤, 등잔불 밑에서 할머니의 동복에 10만원의 거금을 주머니에 넣어 동봉하던 엄마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당시 북한돈 10만원이면 70-80kg 나가는 돼지 한마리를 살수 있었다. (우리동네 기준)
“아이구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큰돈을 나한테 주나, OO아빠 병원비 하는데나 쓰게” 라며 한사코 말렸지만 엄마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몰랐지만 엄마는 알았다. 그 날이 시어머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댁에 드릴수 있는 도움이라는 것을.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한 다는 것을.
할머니는 그렇게 고추 보따리를 들고 왔다가 통돼지 한마리 값을 들고 집으로 가셨다. 12월, 할아버지 생신 때문에 나 혼자 시골로 향했다. 뒷집의 성일오빠 어머니가 물을 길으러 할머니 집에 오셨다가 한마디 했다. 할머니가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아니 글쎄 우리 OO엄마가 통돼지 한마리 값을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내 평생 이렇게 큰 돈은 처음 만져봐” 그렇게 돈을 드리면서 비밀유지를 부탁 했것만 자랑하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막을 수 없었다.
(만약, 갑자기 큰 돈이 생겼다고 하면 당국의 의심을 살수 있어서 보통은 돈 자랑을 하지 않는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