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이스 Aug 26. 2023

열 여섯, 수갑을 차다

여러분들은 수갑을 차 본적 있나요?


아마 열의 아홉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갑을 차는 일이 그만큼 흔한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태어난 곳도 특별하듯이, 열 여섯살에 수갑을 차본 경험이 있다.


2008년 5월, 열 여섯살이 되던해, 나는 가족과 함께 몽골 국경을 넘게 되었다. 5월이지만, 짓눈깨비 내리고, 안개가 자욱했던 그 날을 기억한다. 아빠, 엄마, 외삼촌, 어린 두 남동생과 함께 나침판을 들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야 했던 그 겨울은 (엄밀히 말하면 봄이지만, 나에겐 겨울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에서 지울수 없는 한 장면이다. 배낭안에 짊어 졌던 여름 내복까지 꺼내 얼굴과 목을 꽁꽁 감쌌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건너면서 우리 가족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 피는 곳을 볼때에, 구속 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길 다니리" 찬송가를 부르며, 어디엔가 기대려고 했다. 믿고 싶었다. 우리를 지켜주는 신이 있길 바랬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길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였을까, 저 멀리 러시아로 가는 철도를 발견 했을 때 희망이 바로 우리 앞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여기가 몽골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기차가 다닐때는 모래 바닥에 납짝 없드렸다. 없드리면서도 이게 과연 소용 있을까 싶었다. 나무 한자락 없는 사막이 우리의 체구를 가려 줄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몸을 낮추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틀밤을 지내면서 우리 가족은 드디어 내몽골이라는 확인을 가질수 있는 게르를 발견 했다. 사진속에서 보던 천막 같은 집에 누가 봐도 몽골 사람 같은 아들 내외가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그분들에게 양손을 묶어가는 시늉을 하면서 신고해 달라고 했다. 다행히 바디랭귀지를 알아 듣고 국경 경비대에 신고를 했다. 군인들을 보는 순간 우리 가족은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고생 끝! 행복 시작! 우린 이제 살았다. 대한민국으로 갈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확신에 찬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들은 우리 가족에게 수갑을 채웠다. 열 여섯, 내 나이 열 여섯에 처음으로 수갑을 차게 된 것이다. 동생들은 기억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 때 그 애들은, 열 한살과 아홉살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니 억울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수갑을 차고, 화물차에 실려 가야하는지 이해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 한다. 몽골 사람들 입장에서 우리 가족은 불법으로 자신들의 나라에 침범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울면서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엄마, 나라 없는 설움이 이런거야? 일제 강점기 우리 선조들도 이런 느낌으로 고향을 떠났던거야?" 엄마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무슨 소리니, 그때보다 지금이 더 열악하지. 그때는보따리라도 싸고 고향을 떠날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것도 할수 없지 않니? 나라가 제구실을 못하면 백성만 힘든 거란다."


그렇다. 사회주의인민공화국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보다 더 열악한 환경을 국민들에게 안겨 주었다.

굿바이, 공화국, 난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등잔불 밑에서 신문 읽는 할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