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정녕 지갑보다는 마음이 더 쪼그라들어 그 전에는 무시하던 집 앞 **할인마트에 간다.
돈을 벌 때에는 고생한다는 보상으로 되도록이면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사고 싶었다. 장을 보러 가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남편의 잔소리를 무시해 가며 나는 유기농, 무농약의 신선한 채소들이 있는(=비싼) 오가닉 코너로 당당히 가곤 했다. 난 고생하고 있으니까.
온라인 마트도 고급진 보라색의 마켓을 애용했다. 최상의 상품으로 선별된, 무언가 우아한 음식들만 골라둔 것 같은 그곳에서 나는 더 우아해지리라 했다. 난 고생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퇴사를 한 후 지출 중 가장 먼저 줄인 것은 식비였다.
그 전 우리는 주말마다 외식을 했었다. 주중의 피로를 맛있는 것 먹으면서 풀었고 그게 돈 버는 낙 아니겠는가 하며 앵겔 지수를 높였다. 분위기 좋다는 카페를 찾아다니며 일주일의 찌든 피로를 바리스타가 정성스럽게 내려주는 드립 커피로 씻었다.
이제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하기로 했다. 가족 생일이나 정말 기분 좋은 날, 아니면 정말 꿀꿀한 날만 하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결혼 후 20여 년만에 삼시 세끼, 주 7일의 일용할 양식, 한식을 만드는 우리 집 전속 요리사가 되었다. 와, 매일매일 메뉴 걱정을 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인 줄 몰랐다. 긴 명절에 시가에 가서 시어머니의 보조로 일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가사 노동은 우렁 각시나 하면 좋겠다. 아무리 해도 티 나지 않는다.
그리고,
카페는... 무슨. 대신 로스팅된 원두커피를 사다가 마시기 직전 갈아서 정 씨 성을 가진 남자가 정성스럽게 내려주는 '정다방'의 커피를 마신다. 남편은 나의 수많은 부탁 중 '커피 좀 내려 주세용' 하는 콧소리 섞인 부탁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지, 내가 내리는 커피가 맛있기는 하지' 하며.
분위기는 부엌이지만 맛은 어느 카페 못지않게 깊다. 이 남자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는 거야.
우리 집 바리스타의 작은 공간 '정다방'
주말이면 대형 마트에서 한꺼번에 일주일치 식재료를 잔뜩 사두고는 썩어서 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장 볼 당시에는 의욕 충만하여 다 해주마 해놓곤 피곤해서 만들기 간단한 것들 위주로 해 먹었던 것이다.
이제는 되도록이면 냉장고에 많은 음식을 쌓아 두지 않는다. 이틀 정도 먹을 것을 것만 그때그때 동네 마트에서 사 온다. 더군다나 사람이 많은 대형마트는 '사회적 거리 두기'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엄마 오늘은 뭐 먹어요?" 하고 거의 매일 물어본다. "응, 지금 마트 가서 생각해 볼게"
집 앞 할인 마트는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B급' 식재료 마트다. 예쁘지 않고 브랜드가 없는 것들이 많지만
다른 일반 마트의 70~80% 가격이다. 기한이 오늘내일하는 것들은 좀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경기도에서 지급해 준 지역 화폐를 쓸 수 있는 매장이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북적거렸다.
그래도
유기농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농약을 향한 어미의 마음은 꽤 괜찮은 새로운 매장을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필요가 발견을 낳는다.
생협(생산자로부터 직접 생활 물자를 싸게 구입할 목적으로, 소비자끼리 서로 모여 만든 협동조합)이다.
소액의 회비만 내면 무농약 채소를 비롯한 식재료들을 집 앞의 할인 마트만큼이나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오! 동물복지 계란이 보라색 마켓에서 파는 것의 반 값도 안되었다. 다소 멀기는 하지만 운동하는 셈 치면 된다.
그렇게
먹거리에 대한 소비 방향을 밖으로가 아닌 안에서, 모양새가 아닌 실속형으로 바꾸니
식비 지출이 반이나 줄었다. 일한다는 핑계로 외식이 잦았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식재료 구입에 있어서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갑은 반으로 쪼그라들었으나 나의 요리 실력은 배로 늘고 있다. 아이들은 매 끼니 부엌에서 나는 소리에 ASMR를 듣는 것 같은 안정감을 느끼지 않을까? 나 어릴 적 엄마의 밥짓는 소리에 그러하였듯이.
멋진 카페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즐길 수 없다. 대신 부엌 한편에 작게 마련된 남편의 즐거운 정성이 있다.
오늘도 '정다방'의 커피 향이 쪼그라든 내 마음을 그윽이 펴주고 있다.
'B급'에 대한 단상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으나 작아서, 못나서, 약간 흠집이 나서 제 값으로 매겨지지 못하는 것들, 'B급'.
크기와 모양새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보다 많은 것들을 보다 넓게 담을 수 있다. 그것도 가성비 높게. (우리의 삶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