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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Mar 10. 2021

정신 승리가 필요합니다

마음도 헐겁게 - # 헐거워지는 시간들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된장찌개를 끓이시나 보다. 아직 저녁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나도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가만히 누워있다가, 읽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집어 들었다. 전작 '여행의 이유'의 십 분의 일 정도의 흡인력을 가진 좀 지루한 책이다. 시칠리아 섬을 여행하며 쓴 산문인데 '내 안의 예술가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서문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임팩트가 없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다른 생각들이 끼어든다. 안 되겠다.


책을 뒤집어 놓고 '아리아'를 불렀다. "이소라의 '신청곡' 들려줘." 요즘 이 노래에 꽂혔다. 한 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몰입하다가 한 순간에 시들해져 버리는 나는 몇 년 전에도 그녀에게 그랬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되풀이해서 듣다가 흐느낌이 귀신 소리처럼 들리는 순간 그녀를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그러다 '비긴 어게인'에서 몇 년 만에 그녀를 다시 보았다. 바람이 너무 세찼을까. 삭발에 가까운 머리에 옅은 노란 물을 들이고 수행을 하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나타났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녀의 잿빛에 물들 것 같았다.


근래 모처럼 밝은 그녀를 발견했다. '히든 싱어'에서 그녀는 자신을 잊지 않아 준 사람들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사랑받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안듯이.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빠졌다. 이 '신청곡'이라는 노래를 통해서. 지나간 사랑을 소환해 낼 수 있는 용기는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이야기이다. 건강해진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궁상맞게 들리지 않았다.

'신청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이소라의 프러포즈 시즌 2'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탄 냄새가 났다. 아이고, 아랫집 아주머니가 된장찌개를 또 태우셨구나. 이때 밖에서 딸이  "엄마!" 부른다. 나는 음악에 흠뻑 젖은 상태로 우아하게 대답한다. "왜애?"  "가스레인지에서 연기가 나요. 나도 지금 봤어!"

헉! 이런! 냄새 유발자는 아랫집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어제 먹다 남은 된장찌개가 상할까 봐 한 번 더 끓이고 있던 것을 깜빡했다. 후다닥 달려가 보니 두부와 냄비가 까맣게 한 덩어리가 되어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점점 산만해져 간다(이 글도 산만하다). 뇌세포의 노화란 생각의 잔가지들이 늘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레떼의 강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일 게다. 된장찌개를 가스불 위에 올려놓고는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찌개는 잊힌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시선은 책장으로 가고, 의식은 김영하에서 이소라까지 흘렀다(그녀의 감성에 너무 빠져있었다). 요즘의 내 상태라면 가스레인지에 무언가를 올려놓고는 다른 공간으로 가면 안 된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내 속이 더 새까맣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속으로 눈치 없이 흘러드는 노랫소리에 확 짜증이 났다. "아리아! 시끄러워. 조용히 해!" 괜히 상냥한 그녀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인기 작가의 책이 늘 매력적 것은 아니며(에겐 슬픈 일이겠지만), 잊었던 그녀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된장찌개는 우리 집 가스레인지 위에서도 타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멀티(multi)가 어렵다는 섭리를.


30대는 30킬로미터, 50대는 5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시간이 흐른다지. 갈수록 빨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나는 성기어 간다. 제 속도를 모르고 이것저것 하다 구멍이 숭숭 나 헐거워진다. 화도 내보지만 결국 허탈하게 웃고 만다. 어쩌란 말인가.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헐거워진 것들을 '섭리'라 부르며 포도나무 아래 여우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멀티가 안 되는 것은 여유를 가지라는 신의 섭리다.(라고 우겨본다)


헐거워진 마음은 오히려 많은 것을 담는다. 

'그렇구나'하며 인정하게 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제 주방 식탁에 앉아 (지루하지 않은) 책을 읽으며 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련다. 찌개도 지키고 제멋대로 흐르는 의식을 잠시 책에 묶어둔다. 마냥 '정신승리'로 만족하다간 우리 집 냄비가 남아나질 않을 것이기에.


주방에서 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며



책 읽기가 지겨워지면 뜨개질도 해야겠다.

뜨개질이란 공기도 같이 짜는 것이라던데. 성긴 공간들은 비어있는 것이 아닌, 공기로 채워져 더욱 따뜻하고 신축성 있는 스웨터 만든다.

성긴 나의 시간들도 그렇게 따뜻하고 유연하게 짜이기를.



새 술은 새 부대에,

헐거운 시간들은 헐거운 마음에.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 : 인지부조화, '정신승리'의 이야기. 지나치지만 않으면 정신 건강에 좋답니다.^^


표지 사진 - 쿠킹 타이머 (냄비를 지켜줄 것이다)


그림 - 책을 들고 있는 여자(1934)

Aleksandr Aleksandrovich Deine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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