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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May 21. 2020

일하는 엄마를 둔 어린 딸의 아침

동치미 무 송송 계란 비빔밥

올해 스물한 살인 딸아이는 미식가다. 자기가 생각했던 기준 이하의 맛이 나면 나의 정성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너무도 객관적인 음식 평을 하곤 한다.


코로나로 갇혀 있는 내내 우리의 최대 고민은 무엇을 해 먹을까였다.

나의 레시피를 신뢰하지 않는 딸은 늘 이렇게 말한다.

"엄마 그냥 하지 말고 검색해 보고 해요, 네?!"

이런. 약간 기분이 상하긴 하지만 나도 내가 요리에 있어서는 똥손임을 알기에 백종원의 유튜브를 보며 열심히 김치볶음밥을 해다 쳤다.

그런데 이 녀석 '아아 이맛이 아닌데'하며 내 비위를 건드린다. 그러더니,

"엄마 동치미 있어요?" 하고 묻는다.  

"응. 왜!" 내 목소리에 서운함과 짜증이 묻었다.

"계란 비빔밥 해 먹게, 동치미 무 계란 비빔밥!"

"계란 비빔밥이면 계란 비빔밥이지 동치미 무 계란 비빔밥은 뭐냐?"

"엄마 몰라요? 나 어렸을 때 엄마가 아침마다 카레밥 아니면 그것 만들어 줬잖아~. 동치미 무 송송 썰어서.

 난 엄마 음식 중에 그게 젤 맛있었는데. 큭!"

"고오뤠?!"


맞아, 그랬다.

나는 아침잠이 많아 전날 저녁에 카레를 해 놓고 다음 날 아침, 밥에 카레를 비벼 어린 딸에게 주곤 했다. 아침이면 출근과 딸의 등교 준비에 바쁘다고 해도 좀 더 찍 일어나서 성장기에 있는 아이를 위해 먹을 만한 것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남편은 알아서 빵을 구워 먹고 먼저 출근했다 )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카레밥만 먹일 수 없어 참치 주먹밥, 멸치 주먹밥 그리고 간장 계란 비빔밥을 해주곤 했다. 우리 딸은 지금이야 불닭볶음면을 좋아하지만  초등학생 때만 해도 김치를 매워했다. 그래서 배추김치를 씻어서 반찬으로 주곤 했는데 그것마저 번거로워 마침 냉장고에 있던 동치미 무를 잘게 썰어 아예 계란밥에 섞어서 비벼 주곤 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 착하기 그지없는 딸은 게으른 엄마가 바쁘다는 핑계로 제일로 간단하게 만들어 주었던 음식을 가장 맛있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치미 무 송송 계란 비빔밥이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만한 재료와 레시피지만 우리 딸 같은 모든 아들 딸들을 위해 친절하게,

쓸데없이 자세히 설명해 보려 한다.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겠는가.

동치미 무 송송 계란 비빔밥 재료 (1인분 기준)
1. 고슬고슬한 쌀밥 (진밥 아니 되오) 3분의 2 공기
2. 계란 1개 - 동물복지 유정란(계란 껍데기에 쓰인
     인련번호 끝자리가 2 이상인 것 )
*계란만큼 가성비 높은 재료는 없으니 아끼지 말자
3. 식용유 두 큰 술
4. 진간장 한 큰 술
5. 참기름 한 큰 술(많이 넣는다고 더 고소한 게 아니다)
6. 동치미 무 약간
   (내 경우는 엄마와 시어머니가 담가주신)


- 먼저 동치미 무를 송송 썰어 놓는다. (너무 잘게 썰면 씹는 맛이 덜하니 적당히(?))

- 계란 프라이는 반드시 반숙 (흰자만 익도록, 밥을 비벼야 하니 노른자는 절대 익지 않도록 주의)

- 밥은 진밥보다는 차라리 된밥이 좋다 (간장, 동치미 무, 계란에 수분이 많아 진밥이면 죽밥이 된다)

- 그릇에 밥을 담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 썰어 놓은 동치미를 얹은 후 간장, 참기름을 두르고 숟가락으로 맛있게 비벼주면 끝!



시크한 우리 딸!

지금이야 많이 밝아져 허물없이 엄마를 얕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자기를 오해해 (신문지로 만든) 막대기로 때렸던 일도 사춘기 지나 고등학교 때인가 그제야 엄청 억울했었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딸이 그러한 억울함을 표현하지 않았던 때,

나는 둘째를 낳고 얻은 심한 산후풍 때문에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으로 옷이 젖어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한여름인데도 추워서 덜덜 떨었다.

하루하루가 우울해 갓 낳은 둘째가 버거워 울었고 그 어둠은 딸의 사소한 잘못에도 어이없이 폭발해 아이를 아프게 흔들었다.


그때의 잘못이 생각날 때면 나는 딸에게 묻곤 한다. 어릴 적에 엄마가 너를 힘들게 한 적이 언제냐고.

그러나 다행히 딸은 내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했던 장면들은 기억에 없는 듯하다.

단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여름방학식날 비가 갑자기 쏟아졌는데, 교과서를 담은 종이 쇼핑백이 비에 찢어져 책을 바닥에 쏟았던 이야기를 꺼내며 많이 속상해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왔는데 자기는 비를 맞고 땅에 떨어진 교과서까지 힘들게 주워 집에 와야 했다고. 그때 엄마에게 콜렉트 콜로 전화를 했으나 엄마가 나올 수 없다고 했단다.


그렇게 딸은 어두운 감정 표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전거를 혼자 타고 놀다가 연석에 넘어져 허리 부분 살이 찢거졌을 때도 엄마가 없었고, 감기가 걸려도 조퇴하고 혼자 병원에 가고 약을 사서는 엄마가 올 때까지 집에서 혼자 앓았다. 방과 후 친구들과 방방이 타러 놀러 갈 때도 같은 아파트 라인에 있던 아이 친구 엄마가 데리고 가곤 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칭얼대거나 짜증 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말이었다.

아이의 속옷을 보니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그래 이제 생리를 시작할 때가 되었지.

그런데 엄마에게 자기 신체의 큰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니, 뭐지? 섭섭하기도 했고 두려웠다.

딸을 불렀다.

"윤아,  혹시 생리 시작했니?"

"응? 으응...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왜 엄마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래야 엄마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지."

"몰라. 이제 엄마가 알았으니 준비해 줘."


무얼까.

나는 엄마로서 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아이는 무엇이든 나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아이에게 도대체 나는 무엇인 건가.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딸이 한창 사춘기인 중1 때,  둘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 딸이 좋아하는 쌀국수를 먹는데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내 딸인데도 말을 하고 있지 않는 아이가 불안하고 불편했다. 어찌할까 하다가 딸이 좋아하던 아이돌 엑소 이야기를 꺼내니 그제야 몇 마디 꺼내며 얼굴색이 밝아졌다.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는 기억도 안 나고 차가운 딸의 얼굴과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착잡한 마음만 떠오른다.


그렇다고 어두운 아이는 아니다.

웃는 모습이 복숭아같이 상큼하고 화사하다. 배려심이 많아 친구들이 많고 선생님들께도 늘 칭찬을 받았다.

 "윤이는 엄마가 일하시는데도 안정적이고 자기 할 일을 꼼꼼히 해내네요."

일하는 엄마의 아이는 불안정적이고 덜렁거려야 하나? 살짝 기분이 묘했지만 내 새끼 칭찬해 주는데 감사했다.


딸이 고등학생 때에는 나는 지방 발령으로, 남편도 직장 때문에 아이 입시 공부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딸은 자기가 알아서 학원도 알아보고 교내 활동도 열심히 하며 제 길을 스스로 걸어갔다.

우리 딸은, 굳이 나를 위로하자면 일하는 엄마 덕분에 독립적으로 자랐고,

현실을 직시하자면 자신이 처한 결핍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의 안간힘으로 버텨온 것 같다.


내가 퇴사를 하고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과 근 5개월을 매일같이 집안에서만 있으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허물없음'이다. 엄마이긴 하지만 아이들을 낳고 지금처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아이들과 밀착되어 지내본 적이 없다. 장장 5개월 동안 매일의 삼시 세 끼를 집에서 해먹이면서 이제야 비로소 어미 된 충만함을 누리고 있다. 엄마, 엄마, 엄마. 하루에도 몇 번을 불러대는 내 새끼들의 소란스러움이 좋다.

딸이 엄마가 해준 음식이 맛없다고 핀잔을 주는 것이 , 비위가 상하면서도 기쁘다. 


딸, 고맙다.

빠빴지만 게을렀던 엄마의 아침밥을 맛있게 먹어줘서. 최고로 기억해 줘서.

칭얼거리지 않고 너의 결핍을 단단히 견뎌 주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가장 아파했던 순간들을 잊어줘서.


나는 오직 딸만을 위해(아들은 계란을 싫어하고 남편은 아무거나 잘 먹으니) 최고 등급의 계란을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도록 채워둔다. 어린 시절 채워주지 못한 사랑을 계란에 담아 수북이 쌓아둔다. 잘 익은 동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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