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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n 23. 2020

일하는 엄마의 아이는 산만하다고요?

아이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직장을 다니면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단연 아이들이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같은 부서 한 남자 동료도 내 딸과 동갑인 딸을 키우고 있었다. 둘 다 첫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이나 학교 생활들에 대해 정보를 나누곤 했다.

하루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 양육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와이프가 그러는데 일하는 엄마들 애들이 그렇게 산만하다네? 그래서 이번 영어 그룹 과외도 엄마가 집에 있는 아이들만 모아서 하기로 했데"

"일하는 엄마의 애들이 산만하다고요? 제 딸은  안 그런데."

"아니... 그런 아이들도 있다고..."


나는 밥 맛이 뚝 떨어졌다. 혹시 내 아이도 일하는 엄마 때문에 저렇게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영어를 그룹과외를 시켜야 할지 학원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터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딸에게 물어보니 친구들 몇몇은 이미 그룹 지어 각 집마다 돌아가며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아이는 학원으로 보냈다.


아이는 2학년 때 반장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나뿐 아니라 두 부반장 엄마들도 일하는 엄마들이었다. 학부모 면담이 있던 주간 마지막 날 학급 임원 엄마들과 선생님이 차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호호 우리 반 임원 어머니들은 다 직장 다니시네요. 그래도 아이들이 티 안 나고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에요."

이 말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었다.

엄마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까지도 아이들을 '일하는 엄마'와 '집에 있는 엄마'의 아이로 구분 지어 아이들을 바라봤던 것이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직접 겪으시고 하신 말씀이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당연히 집에서 엄마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챙겨주면 아이도 안정감 있게 학교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직장 여부보다는 아이의 성향 자체가 주어진 질서에 순응을 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밖으로 보이는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의 딸은 전자였고 아들은 후자이다.



큰 아이와 일곱 살 차이 나는 아들은 유치원때부터 줄서는 것을 싫어하던 아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수업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칭찬만 듣던 딸아이 때와는 달리 아들은 그렇게 나를 불안하게 했다. 특히 아들이 3학년으로 올라가는 해에 내가 지방 발령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했기에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5학년 담임 선생님과 면담 때의 일이다. 아들이 아이들에게 인기는 많은데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고 수업 시간에 자주 떠는다는 것이다. 나는 불안해하며 선생님께 물었다.

"혹시 선생님, 엄마가 직장 다니는 아이들이 좀 산만하고 태도가 안 좋은가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죠. 특히 찬이는 방과 후에 아이들하고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 같아 걱정이 되니 학원을 하나 더 보내 보세요."

한 숨을 푹푹 쉬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는 길에 알고 지내던 엄마로부터 아들이 PC방을 드나든다는 제보도 받았다.


아들이 5학년이던 그해 늦가을, 나는 회사를 나왔다. 퇴사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아들도 한몫을 했다. 혹시 내가 집에 없어서 아이가 그러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아빠가 챙겨주어도 한계가 있어 저렇게 겉돌고 있나 했다.


퇴사 후 아들부터 잡기로 했다.

이제 나는 '일하는 엄마'가 아니기에 산만하지 않은, 수업 태도 좋은 아이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의 귀가 시간을 당겼고 학원 숙제 검사도 일일이 챙겼다. 자유를 갑작스럽게 잃은 아들과 의기 충만한 나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아이는 아이들과 노느라 귀가시간을 어기는 것이 일 수였고, 학원 숙제는 내가 종용하여야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정말 초기에는 무던히도 아들과 싸웠다.  정해 놓은 테두리 안으로 아들은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했던 딸과 달리 아들은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발 한쪽은  밖에 놓고 자유를 갈망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제발 회사 다시 다니면 안 돼요?"


6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그동안의 전적은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집에 있으면서 예전보다 더 챙겨주고 있으니 나아졌겠지 생각하며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아들에 대한 선생님의 피드백을 기다렸다.

"어머니, 찬이가 인싸예요. 핵인싸.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수업태도가 좋지만은 않아요. 단체 활동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 하고..."

 "....."

 "그래도 착해요."

내 얼굴이 많이 구겨졌는지 선생님께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아이들과 잘 지내고 착하면 됐지 싶다가도 수업태도가 좋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내 속에서 나온 아이들인데 이렇게 다른가. 쉽지 않은 아들을 길들이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협박하느라 목이 컥컥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눈빛으로 멀어져 갔다.


아들의 눈빛에 불안해진 나는 사춘기 관련 자료들을 보며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들을 구했다. 하나 같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한다. 아동 심리전문가인 지인분도 그냥 '놔두라'하신다. 아무리 엄마가 옆에서 잔소리해봤자 독이 된다고. 그러지 말고 아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게 하라고.


아들의 타고난 성향을 이해하고 그냥 바라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욕심 때문에 매번 실패하고 매일 다시 결심한다. 그래도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한 탓인지 우리예전보다 많이 친해졌다. 내가 컥컥거리지만 않으면 아들의 눈빛은 아가 때부터 보아오던 그 눈빛이다.


학습적인 태도를 제외한다면 오히려 아들은 딸보다 예쁠 때가 많다. 특히 정이 많다. 내가 책을 읽거나 모니터 앞에 앉아있으면 아들이 왔다 갔다 하며 말을 건다.

"엄마 눈 버려요. 엄마가 운동하는 시간 동안은 책 읽을 테니 운동 좀 해요."

귀여운 녀석. 그래,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아들의 이 눈빛만은 지켜야 한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자유롭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아들에게 순응적이고 인정 욕구가 강한(학습에 최적인) 딸아이의 성향을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똑 부러지지만 시크한 딸에게 아들처럼 정이 가득 담긴 말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딸은 일하는 엄마의 아이였어도 산만하지 않은 범생이었고, 아들은 엄마가 집에서 잡고 있어도 할 말이 너무 많아 수업시간에도 떠드는 아이다.

 

어떤 아이는 조용하고 어떤 아이는 수다쟁이고 어떤 아이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어떤 아이는 공을 찰 때 가장 행복하다.


몇 주 전부터 학교로 등교한 아들(중 1)은 교실에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자리도 떨어져 있어 선생님과 친구들의 온전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쉬는 시간도 짧고 화장실에서만 간신히 아는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아들이 학교에서 본의 아니게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모든 것들이 제모습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먼지 날리도록 공을 차고, 쉬는 시간에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선생님께 혼나고, 침 튀기며 수다 떠는 아이들로 복작거리는 교실. 당연한 풍경들이 돌아와 우리 아들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핵인싸로 즐겁게 학교에 다녀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또다시 나를 한숨 쉬게 하는 말이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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