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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Feb 23. 2021

조금은 착각하며 살게요, 쉰이거든요

 착각의 쓸모 - # 헐거워지는 시간들


"여보, 저 사람 우리랑 동갑이래."

"정말? 난 나보다 한참 위인 줄 알았는데."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면 나오는 우리 부부의 단골 대화다. 언제부턴가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나이가 가장 궁금해졌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 타인을 기준으로 '내가 얼마만큼 나이 들어 보이는가'를 가늠한다. 같은 연령대의 연예인들을 보면 '나도 저 사람처럼 매일 피부과 가서 관리받으면 금방 저렇게 된다'며 애써 질투를 잠재운다. 옆에서 남편이 콧방귀를 뀐다.


40대일 때는 3040 그룹에 끼어 30대로 물을 탔고, 이제 50대가 되었으니 4050 그룹에 발을 담가야 속이 덜 상한다. 5060 세대에 묶으려 하면 당연히 발끈할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만으로 49세였는데 올해는

만으로 해도 꼼짝없이 50세. 아, 생일이 있는 계절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만 49세다. 늘 가을을 고대하지만 올해는 더디 오기를.


어이없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아줌마'라는 말이 낯설고 '어머님'이라는 말이 거북스럽다.

'아줌마'는 옆집 아줌마에게나 쓰는 말이고 '어머님'은 우리 엄마나 시어머니께 쓰는 말인데 낯선 타인들이 자꾸 나를 그렇게 부른다.

'아가씨'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40대 초반 어느 마트에서였다. 캐비닛 안에 보관해 둔 물건을 꺼내는데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가씨, 저희 캐비닛이 아래칸인데 잠깐만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했다. 헉, 아가씨라니. '아가씨'라 불려지자 나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비켜서 주었다. 그 남자는 짐을 챙겨 나가면서 나지막하게 '아줌마였네'하며 자신의 부인과 함께 히히거렸다. 그새 내 앞모습을 보았던 거다. 당연한 반응인데도 어찌나 창피하고 서운하던지.


'50, 쉰'이라는 나이가 생의 전환점인지 그에 대한 책들이 붐이다. 서점에 가면 일부러 외면한다. 그러한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내가 50세임을 알리는 것이니. 대신 '마흔'으로 시작하는 책을 들어 후루룩 넘기며 옆에서 '쉰' 책을 집어 든 어느 여인을 흘낏 본다. 나는 절대 '50대 어쩌고 저쩌고'하는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글의 제목에는 '쉰'이라는 숫자를 넣었다. 어쩌면 어떤 서점의 나처럼 이 글을 일부러 패스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온라인 글이니 조회 정도는 해보지 않을까, 고 착각해 본다.


적당히 착각하며 사는 건 생활에 활력을 더해준다. 내가 긴 머리를 아직 고수하는 것도 뒷모습만이라도 '어리게 보였으면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앞모습은 당분간 마스크가 덮어줄 것이다. 렇게 산다고 해서 누구에게 해를 끼지는 것도 아니니 내버려 두시라. 



겉모습에 대한 적당한 착각은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으니 사람들의 콧방귀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사고의 나이'에는 객관적이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진보적이던 사람도 보수적으로 되어간다고 한다.

저 참혹했던 유신 시절, <오적>이라는 담시로 부정부패에 대담한 칼날을 휘둘던 한 시인은 시대의 양심이자 호흡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내가 알던 저항과 진보의 지식인아니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정반대의 사고를 갖게 되는지 놀랍다. 생물학적 노화가 사고의 노화까지 일으키는 것인지 슬프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은 '사고의 노화'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고의 노화'의 기준이 '나'로만 향하는 것이다. 귀를 닫고 내 말만 하고 옹졸해지는 것, 그래서 화가 늘어가는 것이 노화인 것 같다.

요즘 부쩍 화가 늘어간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과 자꾸만 큰 소리를 지르는, 나이 든 티를 내는 또 다른 쉰 살 남편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내가 원인일 것이다.



나를 나타내는 사회적 기호, 숫자가 커질수록 삐그덕 거리는 육신을 보조해 주는 도구를  챙기려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써온 근시 안경은 다초점으로 바꾸고 굽이 있는 구두 대신 단화나 운동화를 신는다. 치과에 가면 스케일링을 하고 시린 이를 레진으로 도포해야 좋아하는 새콤한 사과를 즐길 수 있다.


'사고의 노화'를 막기 위한 도구는 단연 '책 읽기와 글쓰기'다. 퇴사를 하고 나서 한동안 우울했다. 나이는 늘어가는데 왠지 퇴보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예전 같지 않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매일같이 사춘기 아들과 싸우다 아이에게 손찌검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들이 아닌 내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집중하기보다 자신을 성장시키라는 말들을 해주었다. 내 글쓰기의 시발점이다.

아들과의 일상을 글로 쓰면서 그라들뻔한 사고를 펼 수 있었다. 아이의 카톡을 우연히 보게 된 후 썼던 '카톡 말고 라면'이라는 글은 아직도 아이 카톡을 몰래 보려 하는 유혹을 강력히 차단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다짐을 해놓고 그 다짐을 허물 수는 없다. 내가 쓴 글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할머니라는 소리를 듣게 되어도 생각의 노화만큼은 막고 싶다. 나만 옳다고 착각하며 살고 싶지 다. 그래서 오래오래 글을 쓰면서 살려한다. 때때로 '허무'라는 녀석이 불쑥 나타나 '그래서 뭐가 바뀌는데'하며 속삭이기도 하겠지만, 이겨낼 것이다. 이렇게 썼으니 이 글 또한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내 글을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본다. 이 착각도 쓸모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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