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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ug 09. 2020

사랑했던 한 소설가에 대한 감정

문득, 신경숙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 나희덕 <천장호에서> 부분


그녀를 사랑했다.

내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빛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언어의 모세혈관을 찾아들어가 붉다 못해 검푸른 빛들을 찾아내었다. 나를 아는 듯한 그녀의 섬세한 글은 소름이라는 감각을 알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깊은 슬픔』속 '은서'의 슬픔을 통해서였다. 읽은 지가 오래되어 이야기의 굵은 줄만 기억날 뿐이지만 '은서'라는 이름이 가진 슬픔의 색깔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당시 한 사람으로 인해 오랜 시간 침잠해 있던 나는 또 다른 '은서'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들이 나를 견디게 했다.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으면,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은서는 웃었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 신경숙 <깊은 슬픔> (1994) p17 -    


그녀의 데뷔작인 『겨울 우화』와 유명세를 안겨주었던 『풍경이 있던 자리』는 오히려 후에 알았다.

만약 이 책들을 먼저 읽었더라면 그녀에게 깊게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남의 깊이는 타이밍이다.


나는 계속 그녀를 탐독했다. 특히 자전적 소설『외딴방』과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한 사유를 담은 『깊은 숨을 쉴 때마다』 깊고 낮은 숨, 아득하면서도 섬세한, 그늘진 그녀의 언어들이 좋았다. 결핍과 슬픔을 아리면서도 담담히 담아내는 문장들은 언제나 나를 유혹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딸기밭』부터였으리라. 몽환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바이올렛』,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으면서도 시큰둥했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내게 권태기가 온 것인가?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으며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 예를 들면, 『딸기밭』의 퀴어적인 소재 같은 것이 거북스러웠다. 책이 출간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맞이하곤 했었는데 내가 원하는 분위기의 글들이 사라지자 차츰 그녀에 대한 열정이 식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쌓였을까. 시간의 두께는 묘해서 식어진 혹은 잊힌 것들을 가끔 사무치도록 그립게 만든다.

나는 그녀의 문장들이 그리웠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처음의 그녀를 다시 만난 것 같아서 기뻤다. '엄마'라는 이름하에 묻힌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에는 『외딴 방』에서 만났던 그녀가 있었다. 이 작품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고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이후의 작품『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는데 또 시큰둥해지는 것이다. 권태가 도졌나 하며 나를 탓하면서도 그녀의 작품들을 꾸준하게 그러나 미지근하게 읽어갔다.


그러다 2015년 늦은 봄,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표절시비가 크게 일었다. 그녀가 작품 초기부터 상습적으로 미시마 유키오의『우국』을 비롯한 여러 작가의 글들을 베꼈다는 것이다*. 그녀의 초기작『전설』부터 시작해서 『딸기밭』,『기차는 7시에 떠나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등.....

  (*이응준 작가 기고문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링크)>)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섬세한 문체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녀가 무엇이 부족하여 남의 것을 탐했을까. 그녀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만큼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용서하려 했다.  워낙 많은 책을 읽고 쓰다 보니 그 글이 내 글인 것 같아 몇 번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당당한 해명이나 겸손한 사과를 기대했다.  나의 그녀라면 진정 그러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를 두둔하는 출판사(창작과 비평, 이하 창비)와 일부 문인들의 방어막 안에서 그녀는 한동안 침묵했고,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시끄러워지자 그제야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 표절로 볼 수 있겠다'라는 미지근한 사과와 함께 2015년 여름에 칩거했다.

한국문학 출판계의 의도된 침묵과 옹호가 그녀를 몰락으로 방치했다. 그렇게 나의 사랑은 초라하게  떠나갔다.



1년 전 그녀는 '창비'를 통해 중편 소설을 연재하며 다시 세상에 나왔다. 최근에도 '창비'를 통해 장편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사만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뿐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녀의 감각은 살아 있으리라, 그녀의 문체는 여전히 모세혈관같이 섬세하리라. 그러나 이미 차가워진 나의 혈관에 그녀의 주삿바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내 혈관 속을 흐를 수 없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없다.


지난 추운 겨울 어느 날 문득 『깊은 숨을 쉴 때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낮고 쓸쓸한 호흡이 느끼고 싶어 져 도서관에서 빌려 다시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의 호흡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그녀의 무감각 혹은 너무도 섬세한 배신이 그녀의 글들에 드리워져 숨을 거두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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