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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ug 18. 2020

연필 깎는 냄새는 커피 향처럼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나는 유화보다는 수채화가 좋다. 강렬함을 내뿜어 눈길을 강요하는 것들보다는 잔잔하고 고요한 것들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스타일을 바꿔보려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이리저리 만지작 거리다가도 카운터로 가져가는 것은 결국 베이지 단색  원피스.

어쩌면 세상에서 나의 결은, 아니 내가 원하는 결은 그런 것 같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흐르는 것.



연이어진 폭우로 산에 깃들거나 산 아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큰 재해를 당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다정하면서도 가혹하다. 어김없이 시작된 오늘 앞에서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늘이 어제처럼, 내일이 오늘처럼 잔잔하게 와주길 바랄 뿐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빠져있다가도 쉽게 일상으로 나와 기분 좋게 다시 음미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그간 읽었던 소설들에는 스토리 파도에 끌려 혼돈의 상태에 머물곤 했는데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잔잔한 시냇물처럼 안전하고 평온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것


달궈진 도시의 여름을 피해 화산 기슭 아오쿠리 마을에 지어진 숲의 여름 별장으로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다. 국립현대도서관 경합 참여를 위해 집중하는 그들은 아침마다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제도용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다. 연필 깎는 냄새는 커피 향처럼 이른 아침의 몽롱함을 깨운다.


우치다 씨는 자신의 파란 스테들러를 보여주었다. 연필 위쪽의 까만 부분을 나이프로 깎아서 나뭇결이 드러나게 하고, 거기에 아름답게 'UCHIDA'라고 쓰여 있었다. (p.63)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연필, 위쪽 까만 부분을 깎아 내 닉네임을 써보았다


숲은 오래된 별장을 품었고 별장 안의 사람들은 숲을 닮았다. 그들은 개성이 강하면서도 서로에게 모나지 않고 다정하다.

수줍지만 완강한 '선생님'에게 있어 건축물은 사람과 호흡하는, 인간 영혼의 동반자이다. 오랫동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던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가, '휠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을 제출한 '나'를 채용한 이유일 터이다. 욕망이 아닌 열정으로 무라이 선생과 그 제자들은 세부적인 것들을 아우르며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프로젝트를 완성해 간다. 그 여정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과 새소리, 곤충들, 음악, 이웃들이 향기를 더한다.  '나'와 두 여인의 감정선이 살짝 긴장감을 주나 그뿐이다. 이 소설의 묘미는 스토리가 아닌 언어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다.


글의 구성은 오래된 숲처럼 평온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하고 담담하다. 그럼에도 독자를 그곳에 깊게 머물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묘사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의 움직임을, 소리를 담백하지만 섬세한 언어로 그려낸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수채화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매미는 이제 암놈 부르기를 단념했는지 지짓 하고 짧게 울고는 계수나무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p.152)



건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뼈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저자가 건축학 분야에서 종사하던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저자 '마쓰이에 마사시'는 오랫동안 편집자 생활을 해온 문학 전공자이다.

건축에 관심이 컸으나 이과 과목이 안 돼서 단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설계도집과 관련 서적들을 즐겨 읽어 이 소설을 위해 특별히 취재할 필요는 없었다고.

오랜 세월 마음속에 축적해온 것을 끌어냈다고나 할까 (마쓰이에 마사시)


이 책을 읽는 내내 무라이 슌스케라는 인물에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이 겹쳐졌다. 더군다나 경합에서 포스트모던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경쟁자에게 패하게 되니 더욱 그러했다.

나는 동대문의 DDP 설계 경합에 지명 경쟁으로 초청되었다. 동대문이라는 땅이 가진 기억을 존중하여, 없어진 성벽도 다시 살리고 낙산과 남산을 잇는 구릉도 만들고 동대문 경기장의 흔적도 남겼지만, 그런 역사와 장소에 전혀 관심이 없던 심사위원들은 우주선 같은 모양을 제출한 그녀(자하 하디드)의 안을 당선시키고 말았다. (승효상의 <묵상>  p. 80)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무라이 슌스케는 일본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가 모델이고, 요시무라 준조는 승효상의 스승인 김수근의 스승이었다 한다. 본연의 것들에 충실한 완고함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설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무라이 선생은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경합에서는 패하게 되어 매일 아침 설계실을 채우던 연필 깎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의 겹침은 옅어져 갔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선생님의 건축 철학을 간직해온 '나'는 숲 속 여름 별장으로 운명처럼 다시 들어선다.

별장 안에 그대로 놓인 국립도서관의 하얀 모형을 만지며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쓰러져가는 여름 별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p.416)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실현된 것과 똑같이 선명하게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소설이란 형체가 남지 않는 것, 사라지는 것을 진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쓰이에 마사시)




유난히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었다. 긴 호흡의 쉼을 원한다면 쓰이에 마사시가 '오랜 세월 마음속에 축적해온',  속 여름 별장으로 들어서 보는 것도 좋겠다.

제도용 연필을 깎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여는 순수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열정 속에서

건축이라는,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지식들이 스펀지처럼 스미고 

스콘 굽는 냄새, 처음 듣는 새들의 이름과 울음소리, 비올라 트리컬러라는 제비꽃,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까지, 지쳤던 오감이 생기를 머금고 피어오를 것이다.

당신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있을지도.




사진 -요시무라 준조의 숲속 별장

출처 - http://takekonbu.fc2web.com/2005/35yosimura/yosimula-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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