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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Sep 02. 2020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코로나로 또다시 멈춤이다. '나오지 말고 있는 곳에 머물라.'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멈추고 머물러 있어서 사람들에게 추방당하고 감옥에서 스러져간 한 사람이.


바틀비, 이 무해하고도 무기력한 인물을 마주하고 나는 당황하고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 같은 류의 사람에게 그는 충격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잉태된 인간은 세상으로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유지되고 살아진다.


관계는 수평적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대부분 수직적이다. 부모와 자식, 선생님과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처럼 말이다. 현 시대는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수직적 관계를 지양하고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라 하지만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위아래로 서게 된다. 머리가 위에 있고 발이 아래에 있는 것처럼.


수평이든 수직이든 주고받는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인간, 태어났으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좌표가 없는 인간은 소외된다. 죽은 자나 다름없다.



유년시절, 관계에 서툰 나는 섬이고 싶었고, 나무이고 싶었다. 고정되어 그 자리에서 그냥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해한 생명체로서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그냥' 보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주어진' 생이라는 알 수 없는 모호함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일정한 틀 안에서 요구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살아진다.

온순하고 나약했던 나는 그 틀 안에서 튀지 않았고, 그 덕에 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지금도 웬만하면 수용하는 편을 택한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꾸려졌으나 발신인도 수신인도 불분명한 우편물 (배달 불능 우편물)들은 소각로로 보내져 재로 사라진다. 그 꾸러미 안에는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지폐가 들어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전해질 반지가 동봉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군가에게도 가 닿을 수 없기에,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상에 던져졌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었던 바틀비. 주검처럼 창백한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기계적으로 밤낮으로 필사를 하다가 출근한지 사흘만에 무엇이든 '안 하는 편을 택한다'.

'안 하겠습니다'가 아닌, 안 하는 '택하겠다'는 그의 말은 낯설지만 강렬하다. 보편적이지 않다. 말단의 '을'인 그에게 밀려오는 갖가지 요구들에 온순하고 창백한 얼굴로 매번 부정(否定)을 선택한다. 마음의 소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이렇듯 기묘하고 불가해한 그에게 화자(변호사)는 동요되고 동정한다. 그러나 결국 무력한 바틀비를 밀어낸다.



감옥, 세상의 질서에 반한 자들이 갇혀있는 곳이다.


방치된 바틀비는 사람들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곳에 계속 머물러있는 편을 선택한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감옥에서의 시간들은 무엇이 다를까.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고정되어 있을 텐데.

어차피 막힌 벽만을 마주보며 서 있을 거면서.

어차피 죽을 거면서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을까?


타인에게 해를 가한 자들, 세상이 거부한 자들이 가는 곳에서 창백하고 무해한 바틀비가 희미한 희망마저 버리는 편을 택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스러져간다. 소멸해간다. 거부되었기에.



그러나 우리 또한,

인류는

어차피

잉태와 동시에 소멸이, 죽음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바이러스 가득한,  지루하고 위험한 터널을 지나며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을 동시에 지닌

바틀비의 말을 되뇌어본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기묘하고도 불가해한 삶.

Memento Mori.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하기에

나는 선택한다.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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