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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l 06. 2020

영원한 행복은 보는 것이 먹는 것으로 되는 상태이다

'존재의 몫'을 생각하며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이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최정인의 시 <비정규> 부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야 하는 삶은 고단하다.'라고 쓰고 있으나

실은

추측만 할 뿐이다.


그 삶의 막다른 길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나는 걷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할지,

아직은 내 것이 아닌 밥그릇을 정성스럽게 씻으며

내일은 내 밥을 담아 먹을 수 있겠지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들어서 알고만 있을 뿐이다.


'자아실현'이라는 인쇄된 인생은 누구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거

사는 건 그저 벌어먹고사는 문제라고 간단히 말해 주었으면 될 것을.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먹는 것과 보는 것, 이 두 작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은 보는 것이 먹는 것으로 되는 상태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닌 장식일 뿐이다. - 시몬느 베이유-


보이는 것을 먹기 위해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넌 먹기 위해 사냐?"라고 농을 치지만, 그 먹고사는 것은 결코 농이 될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노동'은 숭고한 것이다. 그러한 기본적 행위가 거부를 당하고 불안정한 세상이 넓혀져 가니 기막힐  노릇이다. 존재 자체의 몫은 없는 것일까.


올해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의 목표는 '대기업 정규직'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까지 우리의 불안한 삶은 점점 확실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분배의 공정성'에 대해 입술로만 정의를 외칠뿐 나 또한 내 아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오늘도 수학 문제집을 쳐들며 닦달하고 있다. 최소한 중산층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자리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계급의 사다리가 점점 사라져 가고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오늘, 벽에 누워 자기 자신과 그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인의 등을 보며 그리고

평생 노동자들 곁에서 그들의 숨결을 살아온 '시몬느 베이유'의 행동하는 지성 앞에서

나는 이 움직이는 손가락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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