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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Aug 28. 2020

이 폭풍우 속에 현장을 다녀오라고요?

목숨 거는 열정은 사라져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태풍들이 이름을 바꿔가며 쳐들어 오고 있다. 아마 9, 10월까지는 크고 작은 태풍들이 우리를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떨게 할 것이다.


이렇게 태풍이 오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면 현장에서 고생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한다. 그래도 함께 했던 동료들이 있었고 그 위험 속에 앞장섰던 리더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전 팀장은 비상시면 항상 직원들과 현장 점검을 같이 했고 위험한 곳은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확인한 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마치고 나서는 힘내라고 소고기 회식을 해주곤 했다.


그러나 팀장이 바뀌면서 나의 충성은, 버틸 수 있는 힘은 사그라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 일한 팀장은 일명 로봇 맨이었다. 회사에 와서 사적인 대화나 직원들에 대한 관심은 전혀 비추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하는 사람이었다. 뭐,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빼는 모습들을 여러 번 겪으면서 그에 대한 신뢰와 충성은 압력밥솥의 김처럼 피익피익 빠져나갔다.


태풍과 폭우가 예보되면 사업소는 전 직원 비상이었다. 설비가 침수되거나 제방 등이 무너지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진입하기 전에 간부들은 꼭두새벽이라도 출근하여 먼저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태풍은 폭우를 동반하기에 비바람이 거세어지기 전에 최종적으로 현장을 점검해야 한다.


로봇 맨 팀장에게도 이전 팀장의 리더십을 기대하며 현장을 가기 위해 안전장구를 착용하고 기다렸다. 비상시 현장은 위험해서 반드시 2인 이상 가야 하나 담당 직원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팀장과 함께 가려했다. 그러나 팀장은 모니터만을 응시한 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팀장님, 현장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그는 "나까지?" 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일어섰다. 사무동 현관문을 밀자 거센 비바람이 온몸으로 확 덮쳐왔다. 팀장은 "어억"하고 뒤로 물러서더니 나중에 가자고 했다. 그러나 태풍이 더 거세어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곳이 있었기에 나 혼자라도 다녀와야만 했다.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져 현장 점검을 포기했다. 대신 중앙 감시센터에서 CCTV로 현장을 감시했다. 그러나 잠시 후 거센 바람에 몇 개의 CCTV가 고장이 났는지 가장 취약한 현장을 볼 수 없었다. 다소 걱정이 되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팀장이 나에게 그 현장에 다녀오라고 지시했다. CCTV마저 견디지 못하는 현장으로 가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담당 차장이긴 하지만 누가 보아도 위험천만인 상황에 현장으로 가라는 그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눈과 콧구멍이 다 확장된 상태로, 격양되어 나오려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누르며 팀장을 향해 말했다.

"폭풍우 속에 현장을 다녀오라고요? 혼자는 무서워서 못 가겠는데요. 같이 가시죠, 팀장님! "

"......., 싫으면 됐고."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로 향해 나갔다.


태풍 시즌뿐만 아니라 높아진 하늘에 잠자리가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날에도 그의 진가는 불쑥 메뚜기처럼 튀어나왔다. 고요한 어느 가을날, 사무실에 말벌 한 마리가 들어왔다. 그 말벌은 팀장을 향해 윙윙 거리며 돌진했다. 그 미물도 사무실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나 보다. 화들짝 놀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 좀 잡으라'라고 외치곤 저만치 도망갔다. 엄하고 꼿꼿하던 그가 몸을 사리는 모습이란..... 팀장 자리에 가까이 있던 신입 직원이 일어나 전기 파리채로 과감하게 말벌을 처단했다.


그는 골치 아픈 민원인들과의 협상에서도 목소리 큰 한 민원인과 한 판 붙고는 진이 빠졌는지 자신의 일을 내게 일임하였다. 그리고는 내게서 결과 보고서만 받아 위에 보고했다.


시간이 가면 딱딱한 그도 마음을 열고 말랑말랑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로봇 맨은 자신의 격한 감정만 표출할 줄 알았지 직원들의 표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운 정도 쌓이지 않을 만큼. 그럴수록 전 팀장이 그리웠다.

평상시에는 운동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며 일 아닌 것들에 더욱 흥겨워하던 전 팀장은 막상 거칠고 위험한 일에 있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헤쳐 나갔다. 그러나 이 로봇 맨은 누가 봐도 억지인 일들을 직원들에게 시키고 시행하지 않으면 닦달을 해놓고는 퇴근 시간은 또 칼같이 지켰다. 그의 최대 장점은 회식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팀원 어느 누구도 그와 밥을 먹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팀웤을 결정적으로 헤치는 것은 일의 양도, 일의 강도도 아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책임감을 운운하면서도 '나를 따르라'가 아닌 '네가 가라 하와이'를 어물쩍 던지는 로봇 맨 팀장과는 어떤 을 해도 흥이 나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퇴사를 하게 되었다. 로봇 맨에게 시달릴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현장 담당 직원이 가장 걱정이 되어 몇 번이고 당부했다. 팀장이 지시를 내리더라도 절대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장을 가지 말라고. 현장은 사고가 나더라도 뒷수습을 할 수 있지만 너의 안전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일만 떠다니는 경우가 있다. 사람보다 일 자체를 우선시하는 조직에서 책임감은 강요되고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 포장 안에서 새어나가는 신음 소리는 묻혀버리기 일쑤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열정은 사라져야 한다.  누구도 요구해서는 안된다.

목숨 거는 열정은 사라져야 한다.

 


책임감을 운운하며 부하 직원들을 사지에 보내는 상사들이여, 하와이는 네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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