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예퇴직을 했다. 근무년수 20년을 넘겨 자발적으로퇴사를 하면 명예로운 일인가 보다. 일반 퇴직금에다 명예퇴직금을 더 얹어 받았다. 호봉 높은 퇴사자가 제발로 나갔으니 회사로선 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 인해 신입사원을 한 명 더 뽑을 수 있었으니 청년고용에 일조를 한 셈이라고위로해 본다.
어쨌든 나는 태생적으로 모험을 싫어하여 퇴직연금 상품들을 죄다 안전형으로 가입했다. 21년 동안 젊음과 영혼을 바친 대가로 받은 피 같은 돈에 혹시라도 마이너스의 짝대기가 그려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가끔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이 얼마인지를 묻곤 했다.
판타지 소설을 싫어하는 현실주의자 아들의 꿈은 '대기업 정규직 직원'이다. 더도 말고 딱 엄마 아빠 정도만 살아도 좋겠다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에휴.
그러더니 내가 퇴사한 후로는 내 퇴직금의 액수를 무척 궁금해한다. 취업 커리어 쌓느라 여기저기 바쁜 대학생 누나는 물어보지도 않던데 아직 어린 녀석이 왜 궁금해하는지, 난 그게 궁금하다.
" 엄마, 퇴직금 얼마 받았어요?"
" 엄마 건데 왜 네가 관심을 갖지?"
" 몇 억은 되죠? 와, 엄마 부자네!"
" 부자는 무슨, 그런데 왜 네 입이 찢어지냐? "
하긴 나도 양가 부모님이 돈이 많으시면 입이 찢어질 것 같다. 지금은 자식들이 조금씩 생활비를 보조해드려 어려움은 없으시지만 크게 편찮으시기라도 한다면 부담이 클 것이다. 건강하신 부모님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세대까지는 노년의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이 자식의 당연한 도리라고 여겨왔지만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기대하지도 않는 분위기다.
아이들에게 '돈 벌면 엄마 예쁜 집 하나 지어주라'라고 말하긴 하지만 100% 빈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제발 안정된 직업을 제 때에 갖고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만 않고 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의 노후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너희들만이라도 잘 살아달라'라고 이야기하는 게 현실이다.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 하는 시대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 :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도모하다
언뜻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가족 사이에 쓰기에는 이기적이고 황폐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꼬꾸라진 경제가 우리를 그렇게 가도록 만들고 있다. '나'조차도 홀로 서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근래 내 주위에 딩크족과 비혼주의자들이생기고 있다. 회사 후배는 결혼 후 자식 대신 강아지를 키우고 있고 같은 교회 집사님은 큰 딸이 비혼 주의를 선언했다고 걱정하시며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러고 보니 내 딸도 결혼 안 하고 자기 인생 즐기겠다고 아빠 몰래 내게 말하곤 한다. 겉으론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집사님 큰 딸과 내 딸을 위해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다.
청년은 부모보다 가난해질 미래가 사실상 확정된 최초 세대다. 돈벌이가 힘든 현실 탓에 효도를 미룰 수밖에 없는 것뿐 노력하지 않는다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청년은 충분히 고군분투 중이다.
각자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가족을 지켜내는 이타성의 실현이다. (각자도생의 사회, 전영수)
이러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부부는 노후를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하기에 보험 설계사, 은행 직원과 친하게 지내고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되면서부터는 외식과 여행을 줄이고 그 좋아하던 카페에서 분위기를 즐기는 취미도 끊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로 대부분의 분들이 그러하시겠지만). 나의 요리 실력은 늘었고, 남편은 주말 아침마다 커피를 내린다.
최근엔 주식 유튜버 '불사조'의 강의를 열심히 들으며 재산 증식에 더욱 몰입 중이다. 이 유튜버는 자신이 추천한 종목들이 잘 나가면 노래를 불러주는데 요즘 도통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남편은 연신 코로나와 트럼프를 욕해댔다. 영원불멸의 새의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엄마 퇴직금이 얼마인지 아직도 모르는 아들만 대학까지 무사히 보내고 나면 우리 부부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외곽에 조그마한 집 하나 짓고 뒷마당에 쏴아 바람 소리 나는 대나무 키우고, 앞마당 텃밭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깻잎 잔뜩 심어 놓고 먹을 것이다. 봄, 가을이면햇볕 좋은 곳에서 낮잠 자고 책 읽으며 살 것이다.
부디 양가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아이들은 제 때 밥벌이를 하여 우리 부부의 오랜 작은 꿈이이루어질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여보, 요즘 자식들 결혼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데..... 우리 집을 짓고 살 수는 있는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