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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Feb 06. 2022

슬럼프를 이겨내는 39가지 방법_7

7. '존. 버'... 존중하며 버티기

연.반.인.. 연예인 반, 일반인 반을 의미하는 '연반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새로운 컨텐츠 크리에이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유명인 '재재'. 그분이 한 여러 좋은 말들이 있지만, '유 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존버하기! 존중하면서 버티기'란 말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다.  


존.버! 많은 사람들이 존나 버티기(?)로 알고 있는 그 말을 존중하며 버티기라는 말로 재재가 해석하고 풀어줬을 때, 참 청량했다.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을 마신 듯 마음속에 꽉 막혔던 어떤 부분이 순간적으로 뚫리는 기분이었달까. 재재의 '존버! 존중하면서 버티기!'라는 말이 그렇게까지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면서 버티지 못했던 흑역사를 가진 사람 중 하나여서 일 것이다.   


살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위 말하는 '꽃길' 만을 걷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흔히 말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겠지. 대부분의 사람이 살면서 한번 이상은 힘든 순간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존중하면서 버티기란 사실 쉽지가 않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는 주위 지인들이 내게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출산 전의 일들이 전생같이 느껴져" 아마도 인생의 가장 다이내믹한 전환점이었던 '출산'을 기점으로 자신의 상황 등이 너무 많이 변했고, 육아라는 의미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에 지쳐서 한 말 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았음에도 10대 시절이 20대 시절.. 들이 가끔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심지어 내가 사귀었던 옛 연인들도 나만의 상상이 아닌가 속으로 의심하곤 한다. 무슨 헛소리냐 싶겠지만,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일들이 어떤 순간들은 정말 전생같이 느껴져서이다. 분명히 기억 속에는 있고 내가 직접 겪은 일임에도 어제 본 TV 드라마의 한 장면보다도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번아웃을 심하게 겪었거나 인생의 힘든 시기가 너무 길어질 때, 자신의 과거가 마치 주마등처럼 전생처럼 느껴지지 않나 싶다.  


예전에 퇴사를 90% 확정 지은 때가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나를 이렇게 만든 회사와 사회에 대한 원망이 최대치로 올라온 상태였다. 하지만 가슴 속 무거운 돌 덩어리들 때문에 10%의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통신요금, 각종 세금 등등 고정비라는 돌덩어리 하나.. 신입직원 뽑는 연령층에서 한 참 멀어져 버린 적지 않은 나이라는 돌덩어리 둘.. 한 줌밖에 되지 않은 비루한 통장잔고라는 돌덩어리 셋.. 20대 시절 대책 없는 퇴사 이후 방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라는 돌덩어리 넷...


나는 신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퇴사 의지를 가족을 제외하고 나와 가까운 지인 세 사람에게 알렸다. 첫 번째로는 입사 전부터 입사 당시와 회사생활 전반을 상의했던 나의 동갑내기 친구 J에게 의견을 구했다. 몇 년간의 회사 생활 동안 회사 근처에 사는 J의 집에 찾아가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고통을 바로 옆에서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켜봤던 J는 산 입에 거미줄 치진 않을 거라며 더 고생하지 말라고 했다. 두 번째로는 기자 시절, 나의 사수이자 기자 시절 멘토였던 선배 기자에게 퇴사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선배는 술 한 잔을 사주면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좀 더 버티었으면 좋겠다고. 마지막으로 전 직장에서 만나서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아는 언니를 찾았다. 아는 언니도 기자 선배와 비슷한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예약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유명한 무당이 있는데, 한 번 찾아가 보지 않겠냐고. 다만 네가 천주교 신자라서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나는 여러 번의 고민 끝에 고해성사와 보석을 각오하고 아는 언니를 따라서 그곳을 찾았다. 어렵게 예약을 하고 찾은 곳이었지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모태 신자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의 선택으로 세례를 받고 주님을 따르기로 한 자로서 죄를 짓는 기분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퇴사 이후의 내 삶에 대한 걱정이 그 두려움을 이겼고 나는 그 집의 문턱을 넘었다. 그런데,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일반 가정집이었다. 평범한 캐주얼 차림의 비교적 젊은 나이의 아주머니가 나와 언니를 맞이해줬다. 하지만, 내가 천주교 신자여서 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하는 말이 내 가슴에 그렇게 확 와닿지 않았다. 왜 용하다고 말하는지 사실 의문이 갔다. 그래도 그분의 어떤 말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3년은 더 고생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딜 가나 똑같아. 꼭 지금 퇴사해야겠어?"  


3년은 더 고생해야 한다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사무치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스스로 고생을 충분히 할 만큼 했다는 착각을 해서였던 것이다.  


나는 결국 퇴사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퇴사 의사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런 대책 없이 퇴사하고 싶지 않았던 내 가슴속 깊이 자리한 나의 '본심'과 마주했고, 이직을 한 후에 회사를 그만둬야지 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직이 쉽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눌러앉았다.  


나는 이제 퇴사의 꿈이 아닌 이직의 꿈을 ..ing 중이다. 언젠간 꼭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해야지 하는 대한민국 직장인이 90% 이상 품고 있는 그 꿈을 말이다.  


마음에 불었던 폭풍우가 가라앉을 즈음 친구 J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친구 J는 집 문제를 포함한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점집도 가고 철학관도 하고 그랬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도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지금이 좋은 시기가 아니라서 마음에 고통도 많고 번민도 많을 거라고. 하지만 3년만 진득하게 견디면 그 후엔 뭐든지 원하는 대로 잘 풀리고 가만히 있어도 일이 굴러가는 그런 시기를 맞이할 거라고.  


3년은 더 고생해야 할 거라는 말에 나는 울었지만 J는 웃었다고 한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한다. J는 3년만 참으면 된다는 말이 구원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J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고통과 어려운 상황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끝이 없는 고통처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으니깐.  

J의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이 아이는 성장하고 있구나. 나보다 어른스러워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J의 첫 해외여행을 함께 했던 사람은 나다. J와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나는 아니었지만 J에게는 한국 밖으로 처음으로 나가 본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할 때쯤 배에서 큰 북소리 같은 요란한 소리가 꽤 오랜 시간 들렸다. 부산 해운대에 물놀이를 했던 터라 피곤했던 나는 그 소리에도 일어나지 못했고, 잠결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 배 선상에서 뭐 행사 하나? 아~ 피곤하지만 않으면 구경 가는 건데.. 아깝다.'


하지만 J는 깨어 있었고, 그 소리가 비상상황을 알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 이대로 죽나? 이렇게 젊은 나이에? 첫 해외여행에서? 억울하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배에서 나는 소리에 새벽 내내 벌벌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소심하고 연약했던 J가 성장할 동안 나는 성장은커녕 오히려 후퇴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함께 떠난 일본 여행이 그저 추억의 한 페이지였지만, J에게는 교훈을 얻었던 여행이었던 것 같다. J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아쉬웠다고 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겁고 재미있게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존중하며 버티기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여러 가지 힘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역시 '긍정'이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고, 만들 수 없다는 과거의 좋은 기억을 상기하면서 반드시 다시 좋은 날, 행복한 순간이 올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는 것!  


나는 J와 일본 여행 이후 여러 실패를 겪어왔고 그 실패에 매몰되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것을 마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애초에 나한테 그런 좋은 일, 좋은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사치인 것처럼 그런 기억들을 마주 하지 않았고 또 그래서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을 견디는 힘도 부족해지고 상황을 마주하는 시선도 부정적으로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TVN 드라마 '불가살'에거 이런 장면이 나왔다. 수백 년을 살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가족을 회상하는 장면. 자신의 부인과 아들이 내리는 비를 보면서 까르르 웃은 장면. 남주인공은 불행한 삶을 살았고 복수를 위해서 살고 있는 존재였음에도 그런 존재에게도 아주 찰나이긴 하지만 행복한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짧지만 가슴 깊숙이 자리한 따뜻하고도 빛나는 순간.

  

누구나 돌아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살면서 지쳤을 때, 고통의 시기를 마주했을 때, 그런 순간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서 현재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언제나 어떤 순간에도 '현재'가 우선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니깐.)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나의 빛났던 순간들을 다시 복기해봤다. 한 여름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학원 친구들과 거리를 웃으면서 었던 기억.. 폭설로 버스 운행이 어려워져서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을 밟는 소리를 들으며  앞서거니 서거니 하면서 서로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몇 시간이고 함께 걸었던 기억... 함께 친 텐트 안에서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폭풍우 치는 밤을 온 가족이 같이 지새웠던 그 밤.. 첫 눈이 오는 날 카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 마셨던 그 순간.. 밤새 술을 마시고 함께 술병으로 앓아 누었던 그 상황..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폭죽 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했던 그때...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파리를 쏘다니던 그때 그 시절.. 기다렸던 연락을 받고 얼굴로 퍼져나갔던 그때의 그 미소...,

  

복기를 해보니 내 기억 속에 빛나는 기억으로 남았던 순간들은 의외로 소소했던 순간들이었다. 상을 받았던 순간도 아니고, 장학금을 받았던 순간도 아니었다. 남들이 제3자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런 순간들이 나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내가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슬럼프...ing 인 나는 언제나 늘 이런 고민을 하곤 한다. "..GO? ..STOP?" 솔직히 어제도 고민했다. 나에게 올해 주어진 감당하기 어려운 큰 프로젝트가 2개가 있는데, GO! 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다시 한번 STOP을 고민한 것이다. 고생스러울 것이 뻔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크고, 고생하고 그만두니 그만둘 거면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 그만둬야겠다 싶어서이다. 피할 수 있다면 진심으로 비껴가고 싶다. STOP 하고 싶다.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준 회사와 특히 반강요하다시피 한 선배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STOP보다 GO가 나에게 훨씬 더 이익이긴 하다. STOP 했을 때의 리스크와 GO 했을 때의 이득을 비교했을 때, 후자 쪽이 크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존. 버'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존중하며' 보다는 '버티기'에 힘이 실린 '존. 버'지만. 나의 반짝반짝 좋았던 순간들을 복기하면서 '존중하며'쪽에 힘을 최대한 힘을 실어보려 한다. 그리고, 복기뿐만 아니라 그러한 순간들을 신규로도 만들어 보려 한다. 그래서, 대형 프로젝트를 앞두고 여수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은 반짝이는 순간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치트키'니깐. 삶이 나에게 도대체 좋은 판을 깔아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나도 '치트키'를 쓸 수밖에!  나의 '존. 버' 치트키가 제대로 먹히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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